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묻자 공자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라고 답한다. 그러자 자공이 또 묻는다. "어쩔 수 없이 이 중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포기해야 합니까." 이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공이 "그러면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라고 다시 묻는다. 그러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고 이유를 설명한다. '논어'의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의 유래다.
안타깝게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정부에 대한 이런 믿음이 깨졌다. 정책의 우선순위, 대응 방법 등에서 모두 그랬다.
메르스 첫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지난 5월20일. 그 후 10여일 동안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에 메르스는 없었다. 대통령에게 처음 보고된 것은 5월26일 국무회의 때로 전해진다. 환자가 나온 지 6일 만의 보고였다. 그때까지 공무원연금 개혁안, 국회법 논란 등이 청와대와 정부의 주요 현안이었다. 메르스와 관련한 유언비어가 난무하면서 불안감이 증폭된 것은 믿을 만한 정부의 지침이나 안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보건복지부가 사태를 안이하게 본 것이 원인이었지만 그 후에도 청와대는 국회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국회와 논쟁을 벌이는 데 더 혈안이 돼 있었다. 그 사이 확진환자는 계속 늘어났다.
메르스 확진환자 발생 이후 대통령의 메르스 사태 대응 관련 회의는 6월3일 청와대에서 열린 메르스 대응 민관합동 긴급 점검회의였다. 이미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확진환자가 35명에 달했을 때다. 이날 '범정부 메르스 대책지원본부'가 구성됐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5일 대통령은 통일준비위원회 민간위원 집중토론회 일정을 연기하고 국립의료원을 찾는다. 메르스 확진환자가 발생한 지 17일 만의 현장 방문이었다.
실제로 정부와 청와대 내부에서는 다각적인 대응 방안이 강구됐겠지만 국민에게는 공무원연금 개혁안과 국회법 등이 환자가 급증하는 메르스 대응책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비쳤다. 좀 더 빨리 메르스 대처가 최우선 순위로 올라왔다면 상황은 지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었다. 설령 치료 방법이 없어 확진자와 사망자가 생겼더라도 정부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까지 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확진환자가 거쳐 간 병원에 대한 공개 역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오판한 결과다. 병원 공개에 따른 혼란과 부작용을 우려해 공개를 미적거리는 사이 확진자는 계속 불어났다. 병원 공개까지 18일 동안이나 머뭇거려야 했던 이유를 국민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것이 어떤 이유였든 국민의 안위보다 앞설 수는 없었다.
정부를 상대로 '부작위 소송'이 제기된 것도 그런 연유다. 부작위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법률 용어로 메르스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정부가 의무를 소홀히 한 데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소송 결과와 관계없이 상당 부분 국민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대통령은 22일 일본대사관이 주최한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무신불립이라는 말처럼 양국 국민 간에 신뢰와 우의를 쌓으며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의, 즉 믿음이 우선 돼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중요한 믿음이 세월호에 이어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다시 무너져 내렸다. 물론 "제비에도 오장육부가 있다"는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말처럼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을 수 있다. 하물며 공무원연금·노동시장 등 복잡하고 갈등도 첨예한 4대 부문의 개혁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정부의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렇더라도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개혁이 이뤄지고 경제가 살아난들 국민의 믿음이 떠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 무신불립의 의미다. 믿음을 앞으로 어떻게 다시 세워갈지 걱정이다.
/이용택 사회부장(부국장) yt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