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虎患보다 무서운 것

나경원 <국회의원·한나라당>

요즘에는 달라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비디오로 영화를 보려면 독특한 배경음의 공익광고 하나를 반드시 들어야 했다. “옛날 어린이에게는 호환ㆍ마마가 무서웠지만…” 대략 이런 내용의 불법 음란물에 대한 경고문이었다. 지난 22년 이후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기록도 없고 지금은 동물원 같은 곳 아니면 호랑이를 직접 볼 기회가 없어 호환이라는 용어가 조금은 낯설게 들린다. 하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홍수나 가뭄처럼 자연재해의 하나로 여겨질 만큼 호환이 잦았고 심지어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광해군 시절 이귀(李貴)라는 인물은 호환을 잘 막아 임금의 환심을 산 뒤 호랑이 사냥을 빌미로 군사를 몰아 (인조)반정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기(禮記)의 ‘단궁(檀弓)’ 편에도 호환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공자가 어느 고을을 지나다가 한 여인이 슬피 우는 모습을 보고 연유를 물었다. 그 여인은 시아버지와 남편ㆍ자식 등 3대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혔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여인은 그 마을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유인즉 “호랑이가 들끓기는 하지만 세금을 혹독하게 물리거나 못된 벼슬아치들이 재물을 빼앗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는 말이 나온 사연이다. 춘추시대 공자의 고국인 노(魯)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우리 역사에도 이와 흡사한 사례가 있었다. 조선 말 ‘전정(田政)ㆍ군정(軍政)ㆍ환곡(還穀)’ 등 이른바 3정(政)의 문란으로 몰락한 농민들이 호랑이가 있는 깊은 산속으로 대거 숨어들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폭정보다 차라리 호환이 낫다는 체념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지난해 우리 정치를 되돌아본다. 갈등 일변도로 치닫는 사회를 통합하고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할 정치권이 민생과 아무 관련이 없는 법을 둘러싸고 싸움만 벌였다는 자괴감이 먼저 든다. 오죽하면 ‘당동벌이(黨同伐異)’라는 말이 2004년을 규정한 성어가 됐을까. 이대로 가면 먼 훗날 “21세기 초에 살던 어린이는 정치가 무서웠지만…”이라는 광고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부디 새해에는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솥뚜껑을 내던진 식당 아주머니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가 되도록 지혜를 모으자. 그것이 곧 정치란 바르게 한다는 ‘정자정야(政者正也)’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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