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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형은행들에 대한 규제를 더욱 강화하고, 규제 적용 시기도 앞당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월가는 그 동안 규제로 인해 은행들의 수익성이 떨어지고 금융기능을 위축돼 미국 경제의 회복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던 주장을 펼쳐왔다. 하지만 1ㆍ4분기 어닝시즌을 맞아 발표되는 은행들의 수익이 지난해에 비해 크게 개선된 것으로 나타나고, 더욱이 1ㆍ4분기 전체 은행의 이익이 사상 최대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면서 '월가의 엄살'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쉴라 베어 전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의장은 최근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은행의 자본확충, 규제강화의 적기는 따로 없다"며 "은행들은 경기가 나쁠 때는 규제강화가 경제를 더욱 위축시킬 것이라고 하고, 좋을 때는 이러한 규제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규제당국이 보다 엄격한 규제를 밀어 부쳐야 한다"며 "그것이 경제를 위험에 빠트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회에서도 규제강화 법안이 다시 추진되고 있다. 쉐로드 브라운(민주당)ㆍ데이비드 비터(공화당) 상원의원은 자산규모 4,000억달러 이상인 대형은행에 대해 도드프랭크법이나 바젤Ⅲ 규제 보다 훨씬 높은 자본수준을 확보하도록 하는 규제강화 법, 이른바 '브라운 비터 법안'을 추진 중이다. 입법이 이뤄질 경우 시티그룹,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대부분의 대형은행들이 대상이 된다.
미국에서는 금융위기를 몰고 온 월가의 탐욕을 제어하고 '대마불사'(too big to fail)의 모럴헤저드를 막기 위해 금융에 대한 규제가 강화돼 왔지만, 월가의 반발과 로비로 인해 그 속도가 더디게 진행되고 규제수준 또한 갈수록 낮춰져 왔다. 지난 2010년 7월 마련된 도드프랭크법은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2년 유예된 상태다. 이 법은 미국 내 은행과 은행계열사 자기 계정의 증권, 파생상품 거래와 헤지펀드 및 사모펀드와 특수관계를 맺거나 투자하는 행위를 막는 이른바 '볼커룰'을 담고 있다.
월가는 규제가 강화되면 미국 은행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기업이나 가계에 대한 자금공급을 위축시켜 경제회복을 더디게 만들 것이라는 논리를 펴왔다. 은행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은 지난해 파생상품 규제강화와 관련, "미국에 손해가 될 것"이라며 "바젤 규제 역시 반미국적인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터진 지 5년이 지나면서 월가의 논리는 설득력을 잃고 있다.
데이터 로직에 따르면 지난해 기업들의 채권발행규모는 9,400억달러로 사상최고치에 달했다. 주택시장 부활 역시 대출문턱이 낮아진 효과를 보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형 은행들의 수익도 당초 예상과는 달리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유명 은행 애널리스트인 딕 보브는 FDIC 규제를 받는 은행들이 지난 1ㆍ4분기에 390억달러의 이익을 올렸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사상 최대 규모다. 보브 애널리스트는 "어느 누구도 규제로 인해 은행들의 수익이 줄어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올 1ㆍ4분기 어닝 발표에서 대형은행들의 수익은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또 최근 대형 은행들이 수익에만 몰두해 리스크가 높은 자산 투자ㆍ판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한 골드만삭스의 중소기업 회사채 투자전문 사업부문 신설이 대표적 예다.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골드만삭스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골드만삭스리버티하버캐피털이라는 이름의 회사는 주식공모를 통해 6억달러를 조달, 신용등급을 부여받지 못한 중소기업의 회사채를 사들이게 된다. 신용등급이 없는 만큼 위험도는 높지만, 그만큼 고금리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시티그룹은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신용파생상품과 연계된 합성증권 투자에 나섰다. 디폴트 위험이 있는 국가의 해운업체에 대한 은행 대출 자산을 엮어 5억달러의 합성증권을 만든 것이다. 위험이 큰 만큼 연 13~15%의 높은 수익이 제공된다.
이런 상황에서 의회가 '브라운 비터' 법안을 추진하자 월가는 벌써부터 반발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이 법이 시행되면 3조8,000억달러의 신용이 줄어들게 된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규제강화론자들은 과거에도 규제강화 얘기만 나오면 월가가 엄살을 떨었지만 한번도 그들의 예언처럼 규제로 인해 은행들이 큰 타격을 입거나 경제가 위축된 적은 없었다고 반박한다. 재무부에서 차관보로 일한 경력이 있는 필립 스웨저 메릴랜드대 교수는 "더 높은 수준의 자본확충이 필요하더라도 은행산업의 앞날이 어둡지는 않을 것"이라며 "의회에서 은행의 자본수준을 높이는 데 대해 합의를 이뤄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