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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저녁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손정완·김서룡·김재환·홍혜진 등 'K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8명이 한꺼번에 무대에 올랐다. 국내 간판 디자이너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주목할만한 일이지만 행사장에 모인 500여명의 관람객들은 홈쇼핑업체인 GS샵이 대형 패션쇼 행사를 주최했다는 점에 더 놀랐다. GS샵은 '서울패션위크'의 부대행사로 열린 이날 행사에 14개 브랜드 60여개 작품을 선보여 호평받았다.
지난 2년 동안 패션 트렌드 리더로 자리매김한 홈쇼핑이 또 한 단계 도약해 K패션을 세계에 알리는 전진기지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수년간 장기 불황으로 침체에 빠졌던 패션업계에 새로운 활로를 제공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홈쇼핑이 이제 K패션을 품에 안고 글로벌 무대로 나선 것.
GS샵은 지난 2012년 손정완 디자이너와 협업한 'SJ 와니(WANI)'를 선보인 이래 지난해 김서룡·홍혜진·한상혁·김재환 등 국내 최정상 디자이너 15명과 손잡고 신규 브랜드를 잇따라 내놨다. SJ 와니는 첫 방송에서 완판됐고 앤디앤뎁의 '디온더레이블'은 첫날 매출 40억원을 올려 기염을 토했다.
K패션의 글로벌 공략을 위한 디자이너 해외시장 진출도 다방면에서 지원 중이다. GS샵은 지난해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CFDA)와 양국 디자이너 교류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디자이너 브랜드 매출의 일정액을 디자이너 육성 기금으로 조성하는 등 우수 디자이너의 해외 진출에 팔을 걷어붙였다. 디자이너와 중소 패션업체, 홈쇼핑이 협업하는 선순환 모델을 구축해 K패션 열풍의 진원지로 자리 잡겠다는 전략이다.
김호성 GS샵 영업본부장은 "가격을 앞세워 유행을 따라가기만 했던 홈쇼핑 패션이 이제는 가치를 앞세워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면서 "올해는 해외 7개국의 합작 홈쇼핑을 통해 GS샵을 대한민국 패션 트렌드의 메카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지난해 패션 부문에서만 1조6,000억원의 판매액을 기록하며 업계 선두에 올라선 CJ오쇼핑은 홈쇼핑 패션의 선구자로 불린다. CJ오쇼핑은 2001년 심설화·홍미화 등 디자이너 5인의 해외 컬렉션을 지원하며 가장 먼저 디자이너 브랜드 육성에 나섰다. 이후 송지오 디자이너와 '지오송지오'를 내놨고 '제너럴 아이디어(최범석 디자이너)' '푸시앤건(박승건 디자이너)' 등 프리미엄 디자이너 브랜드를 잇따라 출시했다.
2011년에는 패션시장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트렌드사업부를 신설하고 이듬해 장민영 디자이너의 여성복 브랜드 '드민'을 준비했다. 고급 소재와 미니멀리즘을 강조한 드민은 기존 홈쇼핑 패션의 경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출시 8개월 만인 지난해 5월 국내 브랜드 최초로 홍콩의 명품 편집매장 IT에 입점하는 쾌거를 이뤘다. 지난해에는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와 독점 협업을 체결하고 5년 내 디자이너 브랜드 50개를 글로벌 브랜드로 육성하겠다는 청사진까지 내놨다.
강형주 CJ오쇼핑 온리원상품사업부 상무는 "올해는 신규 디자이너 브랜드를 기존 15종에서 23종으로 확대하고 글로벌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해 K패션을 꽃피울 수 있는 여건을 적극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현대홈쇼핑의 디자이너 브랜드 '맥앤로건'은 국내 유명인사들이 선호하는 브랜드 중 하나로 꼽힌다. 이달로 출시 1주년을 맞은 맥앤로건은 누적 판매량 50만세트를 넘어섰고 최근에는 잡화상품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올 들어서는 패션 전문 코너인 '스타일톡'을 통해 '르자렛 바이 이지연'과 '박윤정 골프웨어' 등 디자이너 브랜드 3개를 연이어 선보였다. 연말까지 8개 브랜드를 추가할 예정이다.
롯데홈쇼핑은 강점인 유통과 마케팅 역량을 발판으로 패션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지난해 3월 박춘무 디자이너와 함께 선보인 대표 브랜드 '탑 시크릿 디데무'는 55회 방송에 27만세트가 판매됐다. 올해는 젊은 여성을 목표로 한 전략 브랜드를 통해 주부 고객 등을 두루 공략한다는 방침이다.
후발주자인 홈앤쇼핑도 패션 시장 진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하용수 디자이너와 손잡고 선보인 첫 여성 패션 브랜드 '엘렌느'는 여성 고객으로부터 고른 인기를 얻으며 첫 시즌 목표치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올해는 소재와 디자인을 한층 고급화해 젊은 층과 중장년층을 동시에 사로잡겠다는 계획이다.
업계에서 한때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홈쇼핑 패션이 이제는 국내를 넘어 명실상부한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표출했다. 단순한 저가 위주의 상품이 아닌 디자인과 품질에서는 글로벌 무대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경쟁력이다. 여기에 홈쇼핑만의 강점인 발 빠른 마케팅과 가격 경쟁력이 더해지면 미국·유럽 등 패션 본고장은 물론 중국·인도 등 신흥시장에서도 새로운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된다.
강병길 현대홈쇼핑 의류팀장은 "디자이너의 이름만 내걸고 팔던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디자이너가 옷을 기획하는 것은 물론 방송에 직접 출연해 다양한 패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며 "좋은 상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안방에서 만나볼 수 있어서 향후 디자이너 브랜드를 둘러싼 주도권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