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11일] 정화 남해원정

동양은 서양을 압도했다. 콜롬버스가 233톤짜리 범선으로 미 대륙을 발견한 게 1492년. 중국의 색목인 출신 환관 정화(鄭和)는 이보다 87년 앞서 대항해를 시작했다. 1405년 7월11일 1차 항해에 나선 정화가 이끄는 함대의 인원은 2만7,800여명. 함선은 보선(寶船) 62척을 포함, 240여척에 이르렀다. 대형 돛이 9개나 달렸다는 보선의 규모는 길이 44장4척(151.8m), 폭 18장(61.6m). 최대 8,000톤, 적게 잡아도 3,000톤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2만톤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학자도 있다. 중국식 허풍쯤으로 여겨진 보선에 대한 기록은 1957년 11m짜리 키가 발굴되며 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정화는 23년간 7차례의 항해를 통해 전세계를 누비며 인도네시아 팔렘방 등에 흔적을 남겼다. 최근에는 정화의 분견대에 의한 미 대륙 발견과 세계일주설도 나왔다. 무엇 때문에 명나라는 연인원 18만명을 동원해 바다를 뒤졌을까. '중국판 수양대군'격인 영락제의 조카(건문제) 추적설에서 순수상업설, 티무르 제국 견제설까지 해석이 분분하다. 확실한 것은 한 가지. 정화 이후 바닷길이 끊겼다는 점이다. 영락제 사후 득세한 유림은 원양용 선박은 물론 항해기록까지 불태웠다. 폴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이를 동양의 쇠락을 가져온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철저하게 지워졌던 정화는 되살아나고 있다. 중국은 보선을 복원하고 정화의 항해를 재연할 계획이다. '위대한 중국'을 만방에 떨치기 위해서다. 신저우(神舟) 유인우주선 계획도 같은 맥락이다. 정화의 대항해 601주년. 같은 동양인으로서 자랑스럽지만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남의 역사마저 훔치려는 저들이 더 강해진다면…. 어이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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