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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또 한번 바다만 쳐다볼 뿐이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평범했던 일상은 비통한 폐허가 되고 말았다. 절대 공포와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앞에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이같은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희망을 건져올린 예술가가 있다. 일본의 현대미술가 아오노 후미아키(46)는 쓰나미의 피해가 가장 컸던 센다이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일부만 남은 부서진 물건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밥상이 많았다. 다리도 한 두개 밖에 남지 않은 밥상 귀퉁이들. 한 때는 이 상을 가운데 두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따뜻한 밥을 나눠 먹었고 오늘을 얘기하며 내일을 꿈꿨으리라. 작가는 이를 실마리로 원래의 형태와 문양을 복원했다. 사라진 부분은 다른 나무를 구해다 정교하게 이어 붙였다. 나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하얀 레이스 식탁보까지 전부, 원래 그 모양처럼 되살렸다. 작가는 플라스틱이나 철제 가릴 것 없이 어떤 소재의 물건이든 '나무'를 사용한다. 소실된 부분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소재가 '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국내 첫 개인전 '환생, 쓰나미의 기억'전이 오는 24일부터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다. 작가는 지난 20여년간 다양한 장소에 버려진 물건을 수집해 복원하는 작업을 해 왔다. 이번 전시에는 2011년 쓰나미의 피해지인 센다이에서 수집해 제작한 작품들이 중점적으로 선보인다.
살아난 것은 밥상 뿐 아니다. 욕실 발매트, 전화기, 트럼프카드, 가구까지. 물에 젖고 찢겨 한쪽 모서리만 남은 책들은 반쪽만 남은 페트병과 서로 몸을 의지한 채 환생했다. 작가는 여기에 '수리,교체,대용,연결, 동일본 대지진 후 미야기현, 나토리시,유리아기구에서 수집된 페트병'이라는 긴 이름과 함께 '기념비'라는 부제를 붙였다. 수집한 곳의 주소를 일일이 제목에 적어둔 것은, 마치 주인이 찾으러 왔을 때 한 눈에 알아보라고 알려주려는 듯 세심하다.
앞부분만 조금 남은 자동차도 일으켜 세웠다. 멋쟁이 아가씨가 신었을 법한 가죽 부츠는 봄날처럼 화려하다. 비록 달릴 수 없는 자동차와 한 짝 뿐인 구두지만 황망한 기억에서 소중한 추억을 끄집어내기 충분하다. 원래 물건과 복원 부분의 이음새가 어렴풋이 보이지만, 이는 기억하고 어루만져야 할 부분이기에 감쪽같이 지울 필요는 없었다.
후미아키는 꾸준히 활동해왔으나 그다지 유명한 작가는 아니었는데, 지난해 '깨어나는 대지-지구·기억·부활'을 주제로 열린 아이치트리엔날레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아이치트리엔날레는 일본 아이치현의 주최로 3년에 한번 나고야시 전역에서 열리는 국제 미술제다. 당시 전시장을 방문한 세계적 컬렉터인 김창일 아라리오갤러리 회장에게 감동을 전한 게 인연이 돼 이번 전시가 성사됐다. 아라리오갤러리 측은 " 대지진과 쓰나미가 휩쓸고 간 고통의 흔적들이 '형태'의 복원뿐 아니라 '의미'의 복원을 이루며 '삶과 예술의 치유'라는 예술의 또 다른 역할을 전한다"고 소개했다. 6월1일까지. (02)541-5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