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문인들을 간첩으로 몰아 형사 처벌한 이른바 ‘문인 간첩단 사건’ 피해자의 소송에서 나온 판결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김우종(85) 전 경희대 국문과 교수와 소설가 이호철(83)씨 등 7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상고심에서 “총 6억9,6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판결했다고 23일 밝혔다.
김우종 교수와 이호철씨 등은 1974년 1월 유신헌법에 반대하고 개헌을 지지하는 내용의 성명 발표에 관여한 뒤 불법 연행돼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범행을 허위 자백하고 그해 10월 집행유예 확정 판결을 받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재심을 권고했고, 재심을 심리한 법원은 2011년 김 교수와 이씨 등의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2003∼2008년 민주화운동보상법상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지정돼 생활지원금(보상금)을 받았던 김 교수 등은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뒤 2012년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에서 패소한 정부는 2심부터 ‘신청인이 동의해 보상금을 받으면 민주화운동으로 입은 피해에 대해 재판상 화해가 성립한다’는 민주화운동보상법 18조 2항을 들어 소송이 적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2심 재판부는 적극적 손해와 소극적 손해,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을 각각 청구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 민주화운동보상법에 의해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피해는 적극적·소극적 손해에 그친다고 해석했다.
이어 생활지원금을 받았더라도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며 김 교수 등의 손을 들어줬다.
2심 재판부는 특히 “배상은 국가의 위법한 행위에 의해 발생한 손해를 보전해주는 것이고, 보상은 비록 국가의 행위가 위법하지 않으나 그 과정에서 특별한 희생을 한 국민에게 그 손실을 보전해주는 것으로 개념상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정부 주장을 받아들여 소송을 각하했다.
대법원은 “김우종 등이 보상금 지급 결정에 동의한 이상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생긴다”며 “따라서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입은 피해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재판상 화해의 효력이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한 원심은 민주화운동보상법 18조 2항의 효력 범위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다”고 덧붙였다.
전원합의체 13명의 대법관 가운데 이상훈·김용덕·고영한·김창석·김소영 대법관 등 5명은 “억울한 복역 등으로 피해자가 입은 정신적 손해는 재심 판결로 새로 밝혀진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
이들 대법관은 “김우종 등이 재심 판결 전에 보상금 지급 결정에 동의했다는 사정만으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공평과 정의의 관념에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유사한 규정을 둔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비롯한 과거사 피해보상법률의 관련 규정 해석에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디지털미디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