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부가 주도적으로 지원을 확대하지 않으면 디자인 산업 주도권은 영영 못 찾아 올 것입니다."
이태용(57ㆍ사진) 한국디자인진흥원장은 20일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한국디자인진흥원에서 서울경제신문 취재진과 만나 정부주도형 디자인 정책 추진 필요성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국내 디자인 산업이 생사 기로에 서 있는 만큼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이를 뒷받침하지 않으면 앞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진단이다. 반대로 정부가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대로 된 지원에 나설 경우 앞으로 5년 안에 디자인을 통한 국격 향상 효과를 끌어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지난 3월27일 취임한 이 원장은 특히 5월 중국 서비스 무역 박람회를 다녀온 뒤부터 위기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반영하듯 그의 표정은 인터뷰 내내 고민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원장은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보다 디자인 산업이 5~10년 정도 뒤처졌다고 주장하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 그야말로 겸손의 표현이었다"며 "최근 영국ㆍ프랑스ㆍ덴마크 등 선진국들이 한국의 정부주도형 디자인 정책이 뛰어난 줄 알고 이를 벤치마킹하려 하는데 정작 디자인 육성이 절실한 중소기업계를 생각하면 이것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이어 "중소기업의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고 적은 돈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는 디자인 산업 만한 게 없다"며 "정부가 디자인 산업에 대한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성장동력 위해 디자인 진흥 시급
이 원장이 이렇게 정부의 부족한 디자인 산업 진흥책에 대해 답답해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중소기업계의 신성장동력 확보 문제 때문이다. 국내 사정을 잘 모르는 다른 나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정부조차 몇몇 대기업의 디자인 경영 성공에만 안주하면서 중소기업을 위한 디자인 산업 정책 개발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원장은 "최근 애플ㆍ삼성 등 대표 기업들을 통한 글로벌 소비 트렌드를 보면 기술이 점점 평준화되는 가운데 결국 디자인이 성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특히 디자인 경영이 절실한 쪽은 중소기업인데 이들은 민간에 그냥 맡기기보다 정부에서 진흥책을 주도하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소기업도 제품 개발 단계부터 디자이너가 주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며 "영국의 다이슨, 덴마크의 뱅앤올룹슨과 같이 디자인을 통한 경영혁신에 성공하는 글로벌 강소기업들이 계속 생겨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원장에 따르면 현재 5조원가량의 국가 산업 연구개발(R&D) 예산 가운데 디자인 관련 예산은 한국디자인진흥원 약 300억원을 비롯해 지식경제부 전체로도 고작 1%가 안 된다. 최근 10년간 산업 R&D 전체 정부지원 금액은 두 배 이상 늘었지만 디자인 분야는 겨우 50% 정도 증가하는 데 그쳤다. 디자인 관련 투자가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얘기다.
산업화 시대만 해도 디자인 산업 지원에 인색하지 않았던 국내 정부가 최근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이 원장은 "디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서비스 산업인데다 최근 대기업들이 알아서 관련 투자를 늘리니 정부도 점차 열정을 잃고 민간에 맡기려는 분위기"라며 "조금만 지원을 늘려도 효과가 클 텐데 많이 아쉽다"고 답답해 했다.
중기, 디자인 중요성 자각해야
이 원장은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의 암운이 짙어지는 상황을 설명할 때쯤 되자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중소기업의 경우 디자인을 투자가 아닌 비용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 디자인 활용 기업이 전체의 13% 밖에 안 되고 그마저도 대부분 1억원 미만 규모"라며 "무엇보다 최근 경제위기가 심화되면 중소기업들은 1차적으로 광고ㆍ디자인 비용부터 줄일 텐데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이 원장은 정부 지원과 더불어 중소기업 스스로도 디자인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를 위해 올해부터는 중소기업 대표이사들을 대상으로 디자인 경영 관련 교육과 홍보를 적극 시행할 방침이다.
디자인진흥원은 올 하반기부터 약 30명의 중소기업 대표를 대상으로 12주간 관련 교육을 실시한다. 또 전문가를 통한 디자인 경영 실태 조사, 활용 콘텐츠 구축 등을 통해 디자인 경영 확산에 대한 해법을 강구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디자인 경영 전문인력 육성을 위한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나아가 산업디자인진흥법 개정도 검토할 방침이다.
이 원장은 "우리나라는 정보기술(IT) 제품 부문에서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디자인 선진국이지만 대부분 대기업이 이를 주도하고 있다"며 "이제 중소기업 대표들도 디자인을 투자로 인식하는 경영 마인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업계 열악한 환경 적극 개선할 것
이 원장은 중소기업계에 대한 디자인 지원 부족과 함께 디자인 업계의 열악한 환경에 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긴 근로시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에 허덕이는 디자인 관련 종사자들의 처우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관련 정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 원장은 "디자인 업계 초봉 수준이 얼마인지 알고 있냐"고 묻더니 "겨우 1,800만원 정도 밖에 안 된다"며 한숨 지었다. 그는 "얼마 전 몇몇 디자인학과 대학생을 만났는데 앞으로의 진로를 물어보니 학계 쪽으로 나가거나 안 되면 한국디자인진흥원에 취직하고 싶다고 답하는데 헛웃음이 나왔다"며 "진흥원 차원에서 디자인 업계의 불공정거래 관행을 바로잡고 해외진출 통로를 열어주면서 이를 해결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설수록 디자인 업계 내 일자리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창출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원장은 "최근 정부 지원이 많아지고 있는 로봇산업만 하더라도 성과가 나오기까지 최소 3~4년의 시간이 걸리는데 디자인 쪽은 장비가 아닌 사람에 대한 투자다 보니 몇 백억원의 돈만으로도 더 큰 일자리 창출 효과를 볼 수 있다"며 "비용 대비 효과를 감안하면 이제 정부도 디자인에 최우선적으로 재정을 쏟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디자인 업계 쪽의 조직적인 자체 노력은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디자인도 하나의 예술이다 보니 디자이너 등 업계 종사자들의 개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며 "디자인 업계가 최근 제값을 못 받고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데 정부는 물론 업계 자체적으로도 전문 역량을 기르고 목소리를 한데 모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디자인 주도 국격 향상도 가능
"K팝만 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정부와 업계가 힘을 함께 모으면 5년 안에 스타 디자이너가 속출하는 'K디자인' 열풍도 불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원장은 앞으로의 5년을 국내 디자인 산업의 생사가 걸린 분기점이라고 진단했다. 지금 상황과 별다른 변화 없이 5년을 넘길 경우 두 번 다시 디자인 산업을 끌어올릴 기회를 잃게 된다는 의미다.
그는 "지난달 중국 서비스 무역 박람회에 연사로 섰는데 중국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서비스, 디자인만을 위한 박람회를 연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며 "중국도 산업화가 어느 정도 이뤄지니 한계를 깨닫고 디자인을 국가 혁신 안건으로 삼아 전체 산업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려 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중국 디자인 산업이 이른 시일 안에 치고 올라올 것이 확실해 보이고 일본 역시 최근 다시금 정부 주도로 디자인 산업을 진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우리도 지금 디자인을 주요 국가 안건으로 세우지 않으면 앞으로의 5년을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 원장은 무엇보다 국내의 협소한 시장을 감안할 때 지금부터 세계 디자인 시장을 적극 공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디자인을 통해 한류를 일으키고 국격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판단이다. 현재 국내 디자인 수출 규모는 393억원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해외와 교류하는 전문 디자인 기업 비중도 전체의 8.2%에 불과하다.
그는 "한국인만의 직관ㆍ감성을 활용하면 5년 내 디자인이 주도하는 국격 향상도 이룩할 수 있다고 본다"며 "정부 지원과 업계의 노력이 어우러져 세계 시장을 향한 퀀텀 점프를 추진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 앞으로의 정책 방향은 이태용 한국디자인진흥원장은 무엇보다 앞으로 디자인 시장 저변을 확대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출 계획이라고 밝혔다. 먼저 디자인 업계에 만연한 불공정 디자인 거래 혁파를 위해 제도개선과 인식변화에 힘쓸 생각이다. 이를 위해 디자인용역표준계약서를 개발하고 산업디자인진흥법도 개정할 방침이다. 산업디자인진흥법 개정안은 현재 정부입법을 준비 중이다. 해외시장 개척 역시 중점 사업 가운데 하나다. 올해 중국 베이징ㆍ상하이ㆍ광저우 가운데 한곳에 글로벌디자인거점 센터 1호를 설립하는 것을 비롯해 지난 2009년부터 운영 중인 디자인시장개척단 규모도 확대할 방침이다. 또 세계 3대 디자인 전시회 가운데 하나인 '100%디자인-런던'에 한국관을 마련하는 것을 비롯해 한국 디자인 발전을 벤치마킹하고 있는 개발도상국(베트남ㆍ말레이시아ㆍ필리핀ㆍ태국 등 4개국)을 대상으로 하는 '해외디자인나눔' 사업도 적극 시행할 복안을 갖고 있다. 특히 해외디자인나눔의 경우 해당 지역에 국가 이미지와 한국 디자인에 대한 호감도를 크게 제고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원장은 "지난해 7월 말레이시아에서 디자인 세미나를 갖기 전후 조사 결과를 확인해 보니 한국의 국가 이미지와 디자인 이미지에 대한 호감도가 모두 상승했다"며 "해외 사업을 통해 우리의 디자인 영토를 확장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신진 디자이너 육성에도 공을 들일 계획이다. 현재 디자인진흥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스타 디자이너 육성을 목표로 '차세대 디자인리더 육성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융합디자인대학(원) 10개교에 대해 3억원 이내 규모에서 교과과정 및 교육 시스템 구축 등을 지원하고 있는 것. 특허청 차장을 지낸 이 원장은 디자인 관련 지적재산권에 대한 문제도 적극 해결할 방침이다. 특히 '디자인 공지 인증제도'를 도입해 디자인 모방방지 시스템을 연내 개발할 생각이다. 이는 디자인에 대한 무단 도용을 방지하기 위해 디자인권 등록 이전에 창작물을 접수, 공지하는 온라인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통해 디자인이 공지될 경우 독점적인 배타적 권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나 창작 여부는 증명이 돼 분쟁 발생시 활용이 가능하다. 이 원장은 "내년부터는 이 제도를 본격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현재 특허청과 긴밀하게 협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서비스업에도 디자인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한다. 이미 4억원의 예산을 들여 의료 서비스 분야에 대한 디자인 활용방안을 지난 4월부터 추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실무 디자이너를 비롯한 관련 분야 종사자 35명을 대상으로 이달 말까지 서비스 디자인에 대한 방법론을 교육한다. 올 9월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서비스 디자인에 대한 이론 강의와 실습을 진행하는 해외 워크숍을 가질 예정이다. 이 원장은 "디자인 활용 분야가 제조업에서 최근 서비스업까지 확대되면서 서비스 디자인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며 "특히 교육ㆍ국방ㆍ치안ㆍ보건ㆍ농업ㆍ상업 등에 전 분야에 걸쳐 디자인이 주도하는 공공서비스 로드맵을 개발하기 위해 관련 부처들과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약력 ▦1955년 서울 ▦1973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78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1978년 22회 행정고시 ▦1988년 UC버클리 대학원 에너지ㆍ자원학 석사 ▦1989년 대통령비서실 정책보좌관실 행정관(정책수석 보좌) ▦1991년 상공부 무역위원회 불공정수출입조사과장 ▦2004년 Invest KOREA 종합행정지원실장 ▦2005년 산업자원부 자본재산업국장 ▦2006년 특허청 차장 ▦2008년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 ▦2011년 아주대 대학원 에너지시스템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