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半半島에서 半島로

지난 27일로 6.25전쟁이 정전된지 50주년이었다. 해방 후 남북은 사실상 분단되었고, 6.25전쟁을 통해 분단은 `확인사살`돼 민족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휴전 후 50년이 넘도록 정전협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민족의 수치이자, 사망 20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의 희생을 남긴 그 전쟁의 야만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정전협정 50년 민족의 수치 그 전쟁의 도발자인 김일성은 죽었고, 그의 아들 김정일이 대를 이어 북녘 땅을 지배하고 있다. 북한의 위정자들은 백성을 굶주림과 헐벗음에 빠뜨린 채 핵무기를 만들어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 그들이 전쟁도발의 책임을 다소라도 벗으려면 북녘땅을 풍요와 평화의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지난 50년 동안 전쟁과 증오를 선동하며 주민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그들에게 그것을 기대하기는 아직 이른 것 같다. 정전협정 50년 동안 남한은 반반도(半半島), 섬 아닌 섬이었다. 형해만 남은 정전협정 가운데 아직껏 유일하게 효력을 갖고 있는 것은 반도의 허리를 자르는 군사분계선(MDL)이다. 반도의 허리잘림은 남한에서 중국과 러시아 대륙으로 이어지는 신경을 끊어 한반도를 하반신 불구로 만들었다. 남한이 가야 할 곳은 바다 건너밖에 없었다. 우방과 시장이 거기에 있었다. 자동차나 열차가 아니라 배와 비행기로 가는 나라였다. 남한이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 된 것은 바다건너에서 살길을 찾아야 했던 지경학적 조건 때문이었다. 반면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 대륙으로 가는 통로와 함께 동서로 바다를 갖고 있었다. 남한보다는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지만 하체가 불구인데 상체라고 온전할 리 없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공산화함으로써 대륙은 군사적 동맹관계 외에 시장으로서 보탬을 주는 상대는 못되었다. 대륙통로도 소련 이동(以東)에 머물러야 했고, 그들이 대적했던 6.25전쟁으로 인해 미국과 서유럽에는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북한이 남쪽으로 바다와 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반반도 상태인 것은 남한과 마찬가지였다. 북한이 동.서의 바다를 잇기 위해서는 남한의 해안선을 공해 밖으로 우회해야 했다. 분단이후 남한은 해양지향, 북한은 대륙지향의 체제였다. 그 결과 남한의 신경선은 더 굵고 튼튼해졌으나 북한의 것은 더 오그라들었다. 냉전체제가 강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같은 선택의 결과가 남북간의 격차를 가져오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휴전선이 한민족에게 끼친 많은 부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지향점을 바다 건너로 잡게 했다는 점 하나는 축복이다. 해방 후 한반도가 좌경화 됐거나 6.25전쟁에서 북한이 승리했더라면 한반도는 오늘의 북한 보다 크게 나아졌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남한에 의해 통일이 됐다 하더라도 공산 중국 및 소련과 접경하게 돼 그들로부터의 영향이 불가피 했을 것이므로 우리의 경제성장의 질이나 속도는 훨씬 떨어졌을 것이다. 그 휴전선에 중대한 변화가 오고 있다. 경의선 동해선 철도가 이어졌고, 육로를 이용한 금강산관광이 이뤄지고 있으며, 문산~개성간 고속도로가 개통될 예정이다. 판문점 경비가 미군의 손에서 한국군으로 넘어와 155마일 전 휴전선에서 미군이 빠지고 남북한 군대가 마주보게 된다. 외향적 생존엔 휴전선이 기여 남북이 육로로 연결된다는 것은 한반도가 온전한 반도국가로 복원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정신적 공간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울에서 차를 몰고 베이징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트이는 일이다. 휴전선의 변화가 중국이 거대한 자본주의적 시장으로 변해가는 시기에 이뤄지고 있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북한도 좁은 군사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반도국가의 복원차원에서 휴전선을 바라보기 바란다. <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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