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24일] 쿠빌라이칸

1260년 1월24일.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스스로 대칸(大汗)의 자리에 오른다. 형인 몽케칸이 남송과 전쟁에서 전사하자, 후계를 잇기 위해 선수를 친 것. 막내 동생 아리크부카의 저항을 물리친 그는 1271년 대원제국 성립을 선포했다. 몽골제국의 정통성 계승을 둘러싼 싸움도 끝났다. 몽골의 5대 칸으로 원제국을 창립한 쿠빌라이칸(원세조)의 통치 아래 몽골은 전성기를 누렸다. 원세조는 화폐사에도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세계 최초로 종잇돈을 대량 발행한 사람이 바로 그다. 세조는 금ㆍ은ㆍ동을 독점하고 유통은 지폐를 사용하는 화폐시스템을 완성시켰다. ‘중통원보교초’ 등으로 불린 원의 지폐는 뽕나무 속껍질을 재료로 만들어졌다. 오늘날 A4용지 정도 크기가 주종인 가운데 33센티미터가 넘는 것도 있었다. 서양인의 눈에 지폐는 경이롭게 비쳐졌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칸의 지폐를 ‘연금술’로 봤다. 금도 은도 아닌 종이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점을 믿을 수 없었다. 지폐는 원나라뿐 아니라 몽골 4개 한국(汗國)에서 통용됐다. 사용을 거부할 경우 형벌을 받았다. 몽골제국은 지폐의 권위를 스스로 깎아 내렸다. 라마교 행사라도 있으면 대량의 지폐를 찍어냈다. 남발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고 결국 멸망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유럽에 지폐가 등장한 것은 17세기 무렵. 쿠빌라이보다 400년 이상 뒤졌다. 구미의 지폐도 남발과 인플레이션 과정을 겪었다. 미국이 독립전쟁시 선보인 ‘컨티넨탈 지폐’와 프랑스 혁명기에 발행된 ‘아시냐 지폐’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쓸모 없는 물건을 지칭하는 대명사였다. 화폐남발의 유혹과 인플레이션에는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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