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특파원 칼럼] '약소국 외교' 펼칠 때 아니다

최형욱 뉴욕특파원 choihuk@sed.co.kr


"한국의 경제 개발과 산업 발전은 일본의 영향 덕분이다."

일본 극우파나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한국 내 일부 친일 학자들의 주장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본사를 둔 중동 언론 '아랍뉴스'의 지난달 27일자 기사 내용이다. 이 언론은 '한국, 아시아 잡석(자갈)에서 호랑이로'라는 제목의 서울 르포 기사에서 서울의 역동성, 아름다운 거리와 문화 등을 극찬한 뒤 "80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 통치가 잔혹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한국의 놀라운 발전에는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쾌하고 서울을 2차대전 이후 1946년 생겨난 '젊은 도시'라고 설명하는 등 역사적 오류로 가득 차 있지만 나름대로 선의를 가지고 쓴 기사다.

느닷없이 중동 언론을 서두에 꺼낸 이유는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 갈등이 국제사회, 특히 미국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말하기 위해서다. 워싱턴포스트(WP) 등 미 언론들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어리석은 행위" "2014년 동북아 정세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며 쓴소리를 내놓고 있다. 미 주일 대사관과 국무부도 이례적으로 "실망스럽다"는 표현을 써가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美, 中 견제위해 日 군사대국화 용인


하지만 이틀 뒤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은 일본 오키나와현이 후텐마의 미 공군기지를 북부 헤코노 지역으로 이전하는 안을 승인한 데 대해 "양국 간 지속적인 파트너십이 한 단계 더 격상될 것"이라며 적극적인 환영 성명을 내놓았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나 도덕적 명분만으로는 미국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는 게 극명하게 드러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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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처음으로 공식 천명한 '아시아 중심축(Pivot to Asia)' 전략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중국을 봉쇄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미국 입장에서 천문학적인 재정 적자로 군비 확충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동북아 패권 유지와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의 군사대국화 용인은 필연적인 수순이다. 이처럼 미국의 세계전략이 역외 균형자나 선택적 개입주의로 바꾸면서 한국 입장에서도 전통적인 한미 혈맹 관계를 기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미국이 아베 총리에 자제를 촉구한 것도 한미일 안보 동맹 관계가 흔들리면서 동북아 전략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지, 결코 한국 편을 들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게 미 현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그동안 미 워싱턴 정치인들과 싱크탱크들은 한일 정상회담을 거부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해 암묵적으로 불만을 표시해왔다. 일본의 역사 인식이 잘못돼 있지만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한국도 문제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베 정권이 추가적인 도발을 감행하지 않으면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워싱턴의 비판적인 분위기도 흐지부지될 수 있다.

우리 정부가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은 아세안 등과 국제 공조를 강화하겠다는 것도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중국과 너무 밀착 관계를 유지했다가는 한미 동맹에 금이 갈 수도 있다. 또 북한 김정은 정권 붕괴 가능성 등을 감안하면 더 이상의 한일 관계 악화도 부담이다.

결국 한국으로서는 100년 만에 최대 격동기라는 현 동북아 정세에서 교묘한 줄타기가 요구된다는 뜻이다. 지금은 미국·중국·일본 등 어느 한쪽과도 일방적인 밀착 관계를 유지하거나 갈등이 심화돼서는 안 되는 시점이다. 이를 박근혜 정부처럼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로 부르건 노무현 정부 시절의 '동북아 균형자론'이라 부르건 상관없이 한미 동맹을 기본축으로 삼으면서도 균형적인 실용외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미 동맹 기조속 실용외교 절실

지금의 한국은 주변 강대국의 야합과 갈등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던 대한제국이 아니다. 한국은 글로벌 외교 무대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갖고 있고 미국과 중국이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주요 국가다. 과거처럼 미국 등에 일본을 압박해주기만을 바라는 '약소국 외교'를 펼쳤다가는 오히려 동북아 정세의 주변 변수로 몰락할 수 있다. 앞으로 몇 십년간의 동북아 질서를 좌우할 중대 전환점을 맞아 박근혜 정부가 한국의 경제력에 걸맞게 외교 분야에서도 구체적이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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