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이 금융거래세(토빈세ㆍIOF)를 철폐한 것은 기존의 통화ㆍ외환정책을 180도 뒤집은 것이다. 브라질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경기를 살리기 위해 양적완화를 실시하자 자국 화폐 가치가 절상돼 수출에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해 이를 강하게 비난해왔다. 기두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주요20개국(G20) 회의 때마다 미국ㆍ유럽ㆍ일본의 양적완화로 신흥국이 경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이처럼 선진국의 양적완화를 강력 비판하던 브라질이 거꾸로 외국인 자금 유입을 유도하기 시작한 것은 브라질 금융시장이 그만큼 위기경보를 내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신흥국들도 통화 가치 하락, 주가 급락 등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여서 잇따라 외환규제 완화책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된다.
불과 두세 달 전 신흥국들은 밀려드는 글로벌 핫머니를 막기 위해 금리 인하 등에 나섰지만 지금은 자금 유출 방지에 안간힘을 쓰는 형태로 바뀌면서 전세계 환율전쟁도 순식간에 전혀 다른 모습을 띨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신흥국, 브라질보다 상황 악화=다른 신흥국들도 금융시장이 극도의 불안 양상을 보이며 브라질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우선 선진국의 양적완화 수혜를 한 몸에 받던 인도네시아ㆍ필리핀ㆍ태국 등 동남아시아 3국의 금융시장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의 벤 버냉키 의장이 출구전략을 시행할 수 있다는 언급을 하면서 3일까지 불과 2주도 안 돼 16억달러의 국제투자자금이 외부로 빠져나갔다.
이는 2011년 8월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자금 탈출 행렬이다. 이에 올 들어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던 필리핀 증시가 2주 만에 10% 가까이 급락하는 등 주가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를 두고 블룸버그는 "세계에서 가장 호황을 보이던 주가가 순식간에 가장 저조한 실적을 내는 주가로 변신했다"고 평가했다.
아프리카 내 최대 경제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달 남아공 랜드화 가치는 달러 대비 11.3%나 빠져 주요 24개 신흥국 통화 중 가장 가파른 하락세를 보였다. 지난달 31일에는 가치가 달러당 10.2847랜드까지 떨어져 4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외에도 1994년 미국의 출구전략에 따른 국채 투매 사태로 국가 부도위기에 까지 몰렸던 멕시코도 10년물 국채금리가 지난달 22일 2.54%에서 4일 3.23%까지 급등하는 등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실제 지난달 달러 대비 화폐 가치가 7%나 하락한 칠레는 원자재 가격 하락 및 성장률 둔화에도 기준금리를 내리지 않고 동결하기로 했으며 중앙은행 총재는 "그동안 절상됐던 페소화 가치가 적정 수준이 됐다"고 밝혀 향후 시장개입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지난달 31일 터키중앙은행 총재인 에르뎀 바쉬츠도 "터키 화폐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화폐정책을 조이는 등 추가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출구전략에 '출'만 말했을 뿐인데…=더 큰 문제는 미국 내 출구전략 논의가 아직 초기 단계라 향후 논의 진전 양상에 따라 전세계 금융시장에 더 큰 혼란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실제 버냉키 의장은 지난달 22일 의회 청문회에서 출구전략 가능성만 언급한 것에 불과하고 향후 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경우 전세계에 1994년 때의 외환위기가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당시 미국은 3년간 3%로 동결했던 기준금리를 1995년까지 불과 1년 새 두 배로 올렸고 전세계로 뻗어나갔던 자금이 급속히 미국으로 회귀해 신흥국 주가지수가 급락하고 멕시코는 국가 부도위기에까지 몰렸다. 소시에테제너랄의 베누아 엔 신흥국 부문 대표는 "신흥국 경제가 적어도 3개월 이상 극심한 압박에 직면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미국만 출구전략을 줄일 뿐 일본과 유럽에서는 여전히 양적완화가 진행되고 있어 혼란의 정도가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ㆍ필리핀ㆍ태국 등은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외환보유액을 최대 7배 이상 늘리는 등 대비책을 세운 상황이라 위기 정도가 과거보다 약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