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승계 구도와 관련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시나리오는 삼성에버랜드를 정점으로 한 지주회사를 만든 뒤 계열분리를 통해 이건희 회장의 세 자녀를 독립시키는 방안이다. 현재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는 사실상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지분 19.3%,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 7.6%를 보유하는 방식의 순환출자 구조로 짜여 있다.
때문에 삼성에버랜드에는 앞으로 삼성을 이끌어갈 이 회장의 세 자녀들이 지분 소유와 경영 참여 등의 형태로 한데 모여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에버랜드 지분 25.1%를 소유한 최대 주주이며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제일기획 사장도 각각 8.37%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사장은 삼성에버랜드의 리조트ㆍ건설부문과 패션부문을 각각 책임지고 있기도 하다.
삼성그룹이 향후 3세 경영 체제로 전환하게 될 경우 당초 재계 안팎에서는 장남인 이 부회장이 전자와 금융 계열사를 맡고 이부진 사장이 호텔ㆍ건설ㆍ중화학, 이서현 사장이 패션과 광고 부문을 각각 담당하는 구도가 점쳐졌다. 지난해 9월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의 패션사업을 넘겨받고 식음료사업은 '삼성웰스토리'로 물적분할한 점 모두 이와 무관치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시나리오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달 초 전격적으로 이뤄진 삼성종합화학과 삼성석유화학의 합병이 대표적이다. 이번 합병으로 기존 삼성석유화학의 최대 주주였던 이부진 사장의 지분율은 33.2%에서 4.91%로 뚝 떨어지며 6대 주주로 위상이 내려갔다. 대신 삼성물산이 33.99%의 지분을 확보, 합병법인의 최대 주주로 올라섰고 삼성테크윈(22.56%)과 삼성SDI(9.08%), 삼성전기(8.91%), 삼성전자(5.28%) 등 전자계열사들이 2~5대 주주 자리를 꿰찼다. 이에 따라 전자부문을 총괄하는 이 부회장이 화학사업까지 가져갈 것이라는 추측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물론 이부진 사장의 지분율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합병법인의 개인 최대 주주인 만큼 석유화학사업에 대한 영향력이 아직 유효하다는 해석도 있다. 특히 이 사장이 합병법인의 지분을 통해 그룹 내 석유화학부문의 최대 계열사인 삼성토탈에 대한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도 이 사장에게는 긍정적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계열사 간 사업 재편의 하이라이트가 될 건설부문을 맡게 될 주인 역시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지난달 말 삼성SDI는 제일모직을 흡수합병하며 그룹 건설부문의 양대 축인 삼성물산과 삼성엔지니어링의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특히 삼성SDI가 지난해 삼성엔지니어링 지분을 삼성물산에 넘긴 만큼 제일모직 합병으로 취득하게 된 삼성엔지니어링 지분을 삼성물산에 넘길 경우 삼성물산은 삼성엔지니어링의 최대주주(20.91%)가 되며 '삼성전자-삼성SDI-삼성물산-삼성엔지니어링'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지배구조만 놓고 본다면 당초 이부진 사장 몫으로 점쳐지던 건설부문이 이 부회장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오게 되는 셈이다.
결국 건설과 화학 부문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 삼성그룹의 후계 구도는 좀 더 명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문에 재계의 관심은 향후 건설과 화학 사업 재편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삼성물산에 쏠리고 있다. 삼성물산의 지배권을 가지면 자연스레 그룹 내 건설과 화학 사업을 모두 거느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삼성이 숨가쁘게 진행한 사업조정으로 삼성물산이 향후 후계 구도의 핵심으로 떠올랐다"며 "결국 삼성물산을 지배하는 3세가 건설과 화학 사업을 모두 거머쥐게 되면서 후계 구도의 구체적인 윤곽도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