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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을 가려고 했지만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발을 지긋이 응시했다. 그때였다. 한 발, 한 발 움직임이 느껴졌다. 결국 지구 반바퀴의 거리만큼 멀게만 느껴졌던 화장실에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수 있었다.
지난 2008년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로 대한민국 서른 살 60만의 마음을 움직인 김혜남(56) 작가가 7년 만에 새 책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로 돌아왔다. 이번 책은 전업 작가로 낸 첫 책이다. 그간 그는 정신과 전문의로 활동하며 총 5권의 책을 펴냈지만, 파킨슨병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 지난해 초 병원 문을 닫고 제주도로 내려가 요양했다.
불치병과 맞서며 오늘이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김혜남씨를 서울 역삼동 자택에서 만났다. '새 책이 나오기까지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렸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지난 7년 간 병원에서 환자를 보고, 강연도 하고, 지구를 등에 지고 있었다"고 답했다. 기자가 '지구를 등에 지고 있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하자 "침대에 자주 누워 있었으니 빈둥거렸다는 뜻"이라며 웃었다.
사실 그가 걸린 파킨슨병은 만만한 놈이 아니다. 파킨슨병이란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생산하는 뇌 조직 손상으로 손발이 떨리고 근육이 뻣뻣해지고 몸이 굳고 행동이 느려지고 말이 잘 나오지 않는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그럼에도 지난 2001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후에도 14년간 왕성한 활동을 해 왔다. '지구를 등에 지고 있었다'는 익살스런 표현을 할 수 있는 긍정적 에너지가 있어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아니었을까.
사실 그가 이번에 책을 내게 된 결정적 이유는 제주도에서 힘든 경험을 하며 느꼈던 마음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초 책 제목도 '한 발짝'으로 하려고 했다.
"제주도에서 몸이 움직이지 않아 화장실을 못 가고 있을 때 한 발짝, 한 발짝씩만 움직이자 마음먹으니 발이 움직였다"며 "그 순간 젊은이들에게 한 발짝만 내딛으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과 고통 사이에는 반드시 덜 아픈 시간이 있는데, 그 순간 좌절한 상태로 가만히 있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면 앞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파킨슨병으로 하루에 4번 약을 먹어야 하고, 약의 효과도 길어야 3~4시간에 불과하다. 나머지 시간에는 언제나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움직일 수 있도록 약 먹을 시간을 기다렸고 집필에 들어간 지 두달여만에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래서 그에게 기다림은 희망이다.
김혜남씨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뒤쳐질까봐 기다리는 것을 잘 못한다"며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서 기다리면 투자한 에너지가 언젠가는 (결과로)나오게 된다"고 말했다. '그 길이 맞는 길인지 틀린 길인지 알 수 없지 않나'는 질문을 자주 받았던 그는 "그 길이 맞는지 모르지만 중요한 건 가봐야 알 수 있다. 안가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림 그리기', '남편과 무인도에서 일주일 보내기' 등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버킷리스트) 10가지를 만들며 지금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그가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은 뭘까. "건강이 허락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사회 민족성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한 책을 내는 것이 최종 꿈이다. 기회가 된다면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인 공포에 대한 책도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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