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리빙 앤 조이] 거대자본과 권력을 꿰뚫는 '삐딱이 예술가의 시선'

■ '변방에서 중심으로' 현대미술가 김기라<br>그림·조각·설치 미술 넘나들며 전방위형 작업<br>새로운 '시각언어 생산자' 끊임없는 비판 '흥미진진'

김기라의 '파이어 이터-위대한 히틀러'(Fire Eater_A Great Hitler)

김기라의 '스릴 라이프(Srill Life)'

김기라

거대권력에 희생당한 피노키오.

슈퍼히어로의 이미지를 재조합한 김기라의 나무조각.

비주류의 목소리로 주류의 한복판에 깃발을 꽂은 사나이.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힐난하는 천재적인 이단아 김기라(36) 작가. 17세기 네덜란드식 바니타스(Vanitas, 라틴어로 덧없음을 뜻하며 해골, 시든 꽃, 썩은 음식 등으로 표현돼 삶의 무상함을 드러냄) 정물화가 현세의 덧없음을 보였다면 김기라는 같은 기법으로 썩은 패스트푸드와 파리가 들끓는 콜라잔을 그려 거대 자본주의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슈퍼 히어로를 기괴하고 무력한 괴물로 조각하거나, 히틀러와 엘리자베스 여왕을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곱게' 그려 선보였다. 삐딱한 시선으로 세계 무대를 누비는 그를 합정동 작업실인 '김기라 공작소'에서 만났다. ◇멀티플 아티스트의 정체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는 김기라 작가에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여하면서 '멀티풀 아티스트'라는 작가 설명을 붙였다. 현대 미술가인 김기라는 화가, 조각가, 설치작가, 미디어 아티스트라는 모든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전방위형 작가다. "학부에서 회화를 전공(경원대 회화과)하고 대학원에서는 환경 조각을 했지만 영국 골드스미스(데미안 허스트 등을 배출한 명문 미술대학)에서는 비주얼 파인아트(Visual Fine Art)와 문화연구(Cultural Study)를 공부했어요. 그러니 화가나 조각가, 설치예술가라고 한 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죠. 자유분방한 현대미술에서 내용에 맞게 개념을 확장시키다 보면 분야에 맞는 각각의 방식이 있기 마련입니다. 형식은 자유롭게 개념은 강하게. 제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면 '시각언어 생산자'라고 하고 싶어요. 눈으로 말하는 시각예술가 말입니다."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서양의 정물화풍으로 그린 파리가 꼬인 썩은 패스트푸드 그림이다. 지난 2008년 부산비엔날레에서는 전광판과 네온사인, 간판 형식의 설치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최근 런던의 프리즈아트페어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이 환호하며 구입해 간 '거대권력에 희생당한 피노키오'는 매끈하게 만든 조각 작품이었다. ◇비주류 시선으로 주류 화단에 입성하다 김기라의 작품 형식은 다양하지만 내용면에서는 '거대 자본주의와 사회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삐딱한 시선과 풍자'라는 큰 맥이 존재한다. 그는 실험적인 작품으로 비영리 전시공간인 대안공간에서 주로 선보이던 '비주류' 아티스트였지만 지난해 국내 최상급 대형 화랑인 국제갤러리에서 '성대한' 개인전을 가졌다. 이를 두고 미술계에서는 '미쳤다', '망했다', '변질된 변절자'라는 식의 논란이 일기도 했다. "청와대로 향하는 삼청동 길, 역사 깊은 경복궁을 마주하고 메이저 화랑에 내 작품이 담겼습니다. 슈퍼메가팩토리(Super Mega Factory)라는 이름으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보여줬습니다. 권력과 권위, 자본의 힘이 꿈틀대는 그 곳을 내가 만든 '상실감의 캐릭터'가 가득 채운 것이지요. 화려한 그 안에서 '작아지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보여줬습니다. 비판할 수도 있지만 속내는 그랬죠." 사실 비판적이라고 해서 비주류, 잘 나간다고 해서 주류라는 식의 이분법은 이미 1980년대 영국에서 신랄하게 다뤄졌던 담론이다. "도발적인 작가 트레이시 에민이 상업적인 화이트큐브 갤러리에 들어간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사회적 주장을 담은 미술작품을 자본으로 환원시켜 이것을 다시 미래의 작품과 문화를 위해 투자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작품이 잘 팔리지만 적어도 나는 '팔기 위해 작업하는' 작가는 아니니까 당당하고요."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그의 발칙한 상상력은 자본가인 컬렉터들을 더욱 자극한다. 심지어 작가는 상승과 추락을 반복한 최근 몇 년간의 증시 그래프를 오케스트라의 악보로 바꿔놓기도 했다. 그래프를 오선지에 올려 그 음계를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제작한 것. 이 신작은 해외에서 먼저 선보일 예정인데 아직 시기와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다. ◇예술은 결국 사회를 위한 것 지방 관료 출신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그를 '삐딱이'로 만들었고 미대 진학을 부채질했다. 하지만 대학 2학년 때 아버지의 소리없는 후원으로 성장한 아이들을 만났고 원망과 분노는 녹아내렸다. 그 이후로 '내가 할 수 있는 예술을 통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꾸준히 찾고 있다. "일년에 두세번은 자선과 기부의 개념으로 전시를 엽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그건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유학시절 킹슬린아트센터에서 문제아 5명을 주인공으로 '너희들이 가진 고민을 사회와 공유하겠다'라며 전시를 했었고 그 약속은 앞으로도 지켜갈 겁니다. 요셉 보이스도 현대미술가이면서 사회운동가로 살았듯 사회적 문제를 문화운동으로 바꾸는 것도 예술가의 역할이니까요." 또한 작가는 창작 뿐아니라 기획도 할 줄 알아야 하고 좋은 작품과 좋은 작가를 알아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후배를 키우는 일은 호랑이 새끼를 돌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홍대 앞 자신의 작업실에 '김기라 공작소'를 차린 것도 젊고 실험적인 작가들을 위해 공간을 열어둔 시도다. ◇경인년, 해외로 내달리는 범띠 사나이 올해는, 아니 올해도 외국 전시 일정에 바쁘다. 독일에서 개인전이 잡혀있고 6월에는 상하이에서 열리는 '아시아의 주목할 작가 10인전'에도 참가한다. 문예진흥원이 선정한 한국작가 50인, 대안공간 루프가 뽑은 아시아 아티스트 100명에도 들었다. 인도ㆍ영국ㆍ일본ㆍ중국ㆍ미국 등 그룹전이 줄줄이 잡혀 있다. "바쁘게 살지만 정작 저는 천천히 스미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봉숭아처럼, 서서히 색이 들지만 지워지려면 여름과 가을 한철을 꼬박 보내고 겨울까지 기다려야 하는. 손톱을 뽑아내지 않는 한 지워지지 않는 그런 작가이자 사람이고 싶네요.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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