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금지.’ 1893년 무렵 보스턴의 20여개 주식방에 열여섯살 소년 제시 리버모어(Jesse Livermore) 경계령이 내렸다. 주식방은 사설 경마장과 비슷한 무허가 중소 거래소. 투자자들을 상대로 95% 이상의 승률을 올리던 주식방들이 그를 마다한 이유는 한 가지, 귀신처럼 투자했기 때문이다. 리버모어가 주식과 인연을 맺은 것은 14세부터. 1877년 매사추세스의 빈농에서 태어나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나 부친이 학업을 중단하고 농업에 전념하라고 강권하자 어머니가 몰래 마련해준 5달러를 들고 집을 나온 직후다. 첫 직업인 주식방의 시세판 서기는 인생을 갈랐다. 주가표시기가 토해내는 시세를 칠판에 옮겨 적으며 시장을 파악하고 주가 흐름을 배워나갔다. 전업투자자로 나선 그는 곧 ‘소년 도박사(Boy Plunger)’로 불리며 업계의 기피인물이 됐다. 수중에 2,500달러를 들고 월스트리트에 진출한 그는 세 번 파산을 겪을 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 수백만달러를 벌었다. 투자수법은 공매도. 주가가 하락할수록 이익이 커지는 공매도에 주력한 탓에 욕도 많이 먹었다. 1929년 주가 대폭락을 예견하고 공매도 작전으로 단숨에 1억달러(요즘 가치 49억달러)를 벌어들였을 때 ‘경제 대공황은 리버모어 탓’이라는 원성이 나왔을 정도다. 월스트리트 사상 가장 악명 높고 솜씨 좋은 투기꾼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삶은 불행했다. 초호화 요트를 굴리며 염문을 뿌리다 가정이 깨지고 재산까지 날린 1940년 11월28일, 호텔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큰아들도 친어머니가 쏜 총에 맞아 일생을 장애인으로 살다 자살했다. 탐욕과 회한으로 점철된 인생이지만 투자자들은 오늘도 그의 ‘현명한 투기’를 배우려 안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