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자는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1998년 2월25일 열린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연설 도중 갑자기 목이 메어 말을 멈췄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조정 요구로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땀과 눈물, 고통'을 언급하던 중이었다.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온 70대 중반의 대통령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으로 대통령의 눈물에 화답했다. 그렇게 온 국민이 똘똘 뭉쳐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섰다.
우리 경제가 내우외환으로 다시 주저앉고 있다. 확장적 거시정책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2·4분기(0.5%) 이후 5개 분기 연속 0%대 저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등 예상치 못한 복병도 있었지만 내수부진이 만성화된 상태에서 수출부진이 겹치는 구조적인 요인의 영향이 가장 컸다. 저출산·고령화·저성장이라는 힘겨운 상대와의 싸움도 계속 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다. 한때 한강의 기적,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릴 정도로 다이내믹한 경제성장을 이뤘던 모습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잠재성장률 추락에 따른 국가 경제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고도 성장기인 1970~1980년대 9%대,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도 5%에 육박했던 잠재성장률은 현재 3%대 초반마저 위협 받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 선순환 구조도 무너졌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생산과 소비, 투자가 감소하고 있는데다 돈이 돌지 않는 신용경색으로 경제의 혈관마저 꽉 막혔다. 현 정부 들어 둔화되던 기업 매출액 증가율은 결국 지난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이대로는 중진국 함정에 빠져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현재 우리 경제 내부의 가장 큰 위협요인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생산성 감소다. 압축성장이라는 단거리 뛰기를 넘어 선진국 도약을 위한 마라톤을 앞두고 경제 기초체력이 점차 고갈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중장기 구조적 요인에 대한 정밀한 외과수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저성장 탈출은 고사하고 다시 주저앉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광복 70년을 넘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잠재성장률 확충과 제조업 업그레이드, 신성장 동력으로 서비스업 육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노동·공공·금융·교육 등 4대 구조개혁은 향후 30년 경제 초석을 놓기 위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제를 살리기 위한 구조개혁의 키는 정치가 쥐고 있다. 전문가들도 경제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터닝포인트'는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과 실행능력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방법은 알지만 모두 눈치만 보느라 액션이 없다"며 "욕을 먹더라도 (옳다고 믿으면) 밀어붙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과거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하면 (그 어떤 정책을 내놓아도) 무용지물"이라며 "일관된 정책 의지를 가지고 구조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도 "IMF 당시 컨설팅 업체인 부즈앨런&해밀턴은 우리 경제의 위기 원인을 'NATO (No Action, Talk Only)'라고 지적했는데 달라진 게 별로 없다"며 "지금은 더 나아가 정책 리포트 쏟아지지만 실제로 하는 것은 없는 'NARO(No Action, Report Only)' 상태"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