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구조조정을 해야 할 기업에 대해서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자잘한 기업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하라고 하니 아이러니일 수밖에요." (A은행 임원)
"'비 올 때 우산을 뺏지말라'고 하면서 '여신심사는 강화해야 한다'는 건 솔직히 모순된 얘깁니다. 은행들의 상환 압박이 시작되면 기업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사례가 나오지 않을 수 없겠죠."(B은행 여신담당자)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이달 들어 의욕적으로 칼을 빼 든 '좀비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 금융 당국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 접근에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가 은행권 안팎에서 커지고 있다. 지속 가능성이 낮은 기업을 정리해야 한다는 큰 틀의 구조조정 방침에는 공감하지만 최근까지도 기술금융 등을 통해 중기대출 확대를 적극 장려해온 당국의 움직임에 비춰보면 너무 급격한 태도 변화이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은 올해 은행권의 중소기업 대출 규모가 경기 흐름에 비해 과도하게 커지는 것을 '창조경제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묵인해왔다. 은행 여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성동조선 등 중소 조선사에 대한 구조조정에 실패하며 국책은행을 통해 천문학적 지원금을 쏟아넣은 당국이 은행에만 구조조정의 짐을 지우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8일 금융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최근 시중은행 여신 부행장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올 하반기 회생 가능성이 높지 않은 기업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한편 정상기업에 여신을 집중할 것을 주문했다.
시중은행의 한 여신부행장은 "회생 가능성이 높지 않은 기업들은 워크아웃이나 자율협약을 통해 추가 자금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청산시킬 것을 주문했다"며 "은행 입장에서는 당장 손실을 인식해야 하는 부담은 있지만 중소기업 여신에 대한 만기 연장 심사 등을 보다 까다롭게 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이 같은 방침과 관련, 미국발 금리 인상에 앞서 기업 부실 리스크를 완화해 잠재적 위기에 대비하자는 차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은행은 그러나 이 같은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도통 일관되지 못한 당국의 태도에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대우조선해양의 수조원대 부실이 드러난 후 부실기업 여신을 회수하려던 일부 은행권의 움직임에 금융 당국 수장이 직접 제동을 걸면서 "비 올 때 우산을 뺏지말라"고 일갈했던 것이 바로 지난달이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성동조선이나 STX조선 등 대형 구조조정 과제들을 다 실패하고 지금 무얼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금융 당국이라면 아무런 가이드라인 없이 구조조정에 최선을 다하라는 일반론을 말할 것이 아니라 산적해 있는 구조조정 과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명확하게 교통정리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도 "이미 상반기에 일부 은행들은 대우조선해양 등에 대한 충당금까지 보수적으로 높게 쌓아 하반기 부실에 충실하게 대비해놓은 상황"이라며 "당국의 구조조정 압박 메시지가 오히려 시장에 혼란을 일으키고 중소기업을 되레 주눅들게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은 금융 당국의 구조조정 압박이 자칫 중기 대출 시장 축소 압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은행들은 올해 들어 대기업 여신을 일제히 축소하면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SOHO)여신을 크게 늘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7월까지 은행권의 대기업 여신은 3조9,000억원 줄어든 반면 중소기업 여신은 36조3,000억원이 증가해 이미 지난해 증가 규모(35조4,000억원)를 앞지른 상태다. 중기대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은행들 입장에서는 가계대출 규제가 심해지고 대기업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에서 중기대출 시장이 아니면 먹거리를 찾기 힘든 상황이다.
시중은행의 영업 담당 임원은 "신용등급이 낮은 중기는 대출을 받기 더욱 어려워지고 우량 중소에만 여신이 집중되면서 은행들이 중기 시장에서도 예대마진을 챙기기가 더욱 버거워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