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립대 미대를 졸업한 김나영(25·가명)씨는 월 30만원을 받는 '어시스턴트(작가 조수)'다. 지난 6월 김씨를 이전부터 눈여겨 보던 한 교수가 "내 작업실에 오면 대학원에서 할 것들을 다 배울 수 있다"며 어시스턴트로 일 하라는 고마운 권유를 했다. 물론 근로시간과 업무 범위를 밝힌 근로계약서는 없었다. 그녀가 처음 맡았던 임무는 교수의 개인전 준비. 교수가 아이디어를 주면 밑그림과 채색, 마무리를 하는 일이었다. 오전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 여섯시까지 작업을 하는 식으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을 했다. 교수는 친절히 간이 침대를 작업실에 놔줬다. 개인전에 채워진 13점의 작품들은 모두 그녀의 손을 거쳤다. 교수는 완성한 뒤 친필 서명을 했다.
3개월을 끝으로 월급은 나오지 않았지만 개인전 추가 주문은 모두 김씨의 몫이었다. 동시에 커피와 담배심부름은 물론이고 명절이면 지인들을 위한 수백 개의 선물 포장까지 모두 김씨에게 주어졌다.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가 진행됐지만 병원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병원을 가야겠다고 하자 돌아온 대답은 "나도 병원을 안 가는데 왜 가야 하느냐"였다. 김씨는 최근 오랫동안 꿈꿨던 진로를 바꿀 결심을 했다.
국립대 미대에 다니는 이은선(가명·24)씨는 지난해 교수의 조교 겸 어시스턴트를 맡은 경험을 '베이비시터'라고 표현했다. 당시 공동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밤을 새야 하는 강행군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이씨는 교수로부터 아이의 생일파티를 준비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장소 예약부터 생일파티 기획해 스무명이 넘는 친구들 답례품까지 직접 준비해야 했다.
전업 작가나 미술계통 진로를 꿈꾸며 어시스턴트로 첫발을 내디딘 청춘들이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노동에 멍들고 있다. 공식 업무는 개인전 등의 작업 보조지만 공사 경계가 분명치 않아 비서와 홍보 일은 물론이고 교수 자녀의 베이비시터까지도 묵묵히 견뎌야 하는 게 현실이다.
지난해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에서 진행한 대학원생 연구환경 조사 실태에 따르면 예체능 전공 학생의 51%가 부당처우를 경험한 적 있다고 응답했다. 인문·사회, 공학 등 6개 계열 중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전문가들은 어시스턴트를 작가들이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으로 두고 있지만 주로 스승과 제자 등으로 엮여 일정한 임금 기준과 계약 시스템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부분의 경우 교수나 작가가 부르는 게 월급이 된다. 서울 시내 예술대학에서 현대 미술을 전공하는 김용준(가명·26)씨는 "선생님들이 일단 일을 시작하겠냐고 의향을 물어본 뒤 요즘 최저 임금이 얼마인지 물어보신다"며 "단돈 십 만원을 준다고 해도 학생은 무조건 '예스'를 외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교수가 하다못해 학예사 인턴십 추천권까지도 쥐고 있는데 누가 거절을 하겠느냐"고 한숨을 쉬었다.
변화는 을의 위치인 학생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목소리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배움과 노동은 어디까지나 뚜렷한 구분이 필요한데 노동을 시켜놓고 배움이라고 하고 얼렁뚱땅 넘기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며 "학생이라도 노동력과 작품 완성의 기여를 원한다면 정당하게 서류를 작성하고 예측 가능한 일을 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은수미 새정치연합 의원은 "해마다 2만5,000명의 미술 전공자가 나오는데 합당한 대우 없이 부려 먹기만 해서는 훌륭한 예술인이 길러지지 않는다"며 "'헌신'과 '예술혼'을 강요하는 대신 장기적으로 예술인으로 커갈 수 있도록 투명한 계약관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같이 익명을 신신당부한 학생들은 "가르치는 것과 일을 시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며 "교육자로서 선배로서 학생을 소중히 생각 한다면 진로를 담보로 부당한 일을 강요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