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 빛바랜 '용퇴' 선언

얼마 전 재정경제부의 한 고위인사가 예고 없이 기자실을 방문, 사퇴의 변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그는 “새로운 인사를 구상하는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편안하게 해주고 인사 적체로 고생하는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다”며 이른바 ‘용퇴(勇退)’를 선언했다. 갑작스런 사표 발표에 기자실은 술렁거렸다. 아울러 용퇴라는 단어에 이르자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격려의 말이 나오기도 했다. 기자실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그간의 고뇌를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용퇴 선언은 잉크도 마르기 전에 퇴색됐다. 사직서 제출 이후 단 며칠 만에 모 위원회 사무처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사실상 관직의 길로 다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경부 후진을 위한 사직이었을 뿐 진정한 용퇴는 아니었다. 고위공무원 사회에서 겉으로는 용퇴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더 나은 자리로 옮기기 위한 퇴직이 비일비재한 것이 현실이다. 고위공무원이 퇴직할 때 으레 산하단체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은 관가의 공공연한 비밀로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후임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은 부처 수장의 주요 역할 중 하나이며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 해당 부처는 심한 인사 적체에 시달리는 것이 요즘 관가의 모습이다. 물론 고위공직자의 이 같은 사퇴는 비단 나쁜 시각으로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인력 활용 관점에서 산하단체 등에서 관직의 경험을 토대로 더 나은 행정을 펼칠 수 있다면 국가적으로도 이익이다. 하지만 후진을 위해 관직에서 물러난다고 해놓고 다른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관 위주의 시스템으로 공무원 순혈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특히 조기퇴직, 명퇴 등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민간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부럽기만 한 것도 현실이다. 과거사를 보면 후배를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고 초야에 묻혀 자연과 벗하며 일생을 마감한 선인들이 적지 않다. 옛 문헌을 보면 이들의 장례를 치를 때 왕이 비용과 음식을 하사했다고 한다. 청빈한 삶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계추를 돌려 현재의 고위공무원에게 이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직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철학을 뒤집고 후임 자리를 놓고 다툼을 하는 요즘 공직 사회도 올바른 모습은 아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진정한 용퇴를 한 공직자가 그리워지는 것은 비단 기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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