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8월22일] 생 도밍고 혁명


‘둥둥둥….’ 부두교 의식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흑인 노예들이 들고 일어났다. 1791년 8월22일 카리브해의 생 도밍고(아이티와 도미니크)에서 일어난 폭동은 미 대륙의 역사를 갈랐다. 생 도밍고는 설탕산업의 중심지. 사탕수수 농장 수천개와 설탕공장 800여곳이 성업하며 프랑스 무역의 3분의1을 차지할 만큼 번영가도를 달렸다. 성장동력은 노예 노동력. 아프리카에서 잡혀와 평균수명 7년을 못 넘길 정도로 혹독한 착취가 폭동을 불렀다. 50만 흑인들의 봉기는 두달 만에 설탕공장 200여곳과 농장 1,800개소를 불태웠다. 지도자는 흑인 노예 투생 루베르튀르. 뛰어난 용병술로 프랑스와 스페인을 물리쳤다. 혼란을 틈타 침공한 영국군을 몰아낸 공로를 인정, 투생에게 육군소장 계급장을 달아줬던 프랑스는 나폴레옹 집권 후인 1801년 4만8,000여명의 병력을 보내 진압에 나섰다. 투생이 생포돼 프랑스로 끌려갔지만 흑인군대는 나폴레옹 군대를 깨부수고 1804년 독립을 선포했다. 자국 내 흑인 노예들의 동요를 우려한 미국은 58년간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첫 흑인 공화국 수립은 스페인 치하 중남미 지역의 독립의식을 일깨웠다. 가장 덕을 본 나라는 미국. 미주 식민지에 ‘제2프랑스’를 건설하겠다는 나폴레옹의 야망을 뒷받침할 병력이 생 도밍고에 묶이는 통에 강력한 이웃의 출현을 모면하고 한반도 10배 크기인 루이지애나를 1,000평당 2.45센트, 총 1,500만달러에 구입하는 반사이익까지 누렸다. 독립 202년을 맞은 아이티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580달러. 최빈국이다. 정치도 불안하다. 부패와 대외의존구조 탓이다. 미국이 지원을 끊을 때마다 경제난이 반복되고 정권이 흔들리는 아이티의 진정한 독립은 아직도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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