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까탈스런 미국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면 우리나라는 유럽연합(EU)과 함께 세계 양대 경제권에 FTA라는 고속철도를 놓는 초유의 기회를 갖게 된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의 조율에 실패하거나 의회 비준에 난항을 겪을 경우 선비준을 강력히 추진했던 정부와 여당은 제2의 촛불사태를 우려하며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져야 한다. 내년부터는 매년 선거가 있어 시간이 많지도 않다. 한미 동맹과 관련해 FTA의 전략적 가치를 미국 조야(朝野)에 얼마나 설득력 있게 세일즈할지 정부의 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사상 초유의 기회와 위험이 동시에=오는 6월 한미 정상회담을 거쳐 미 의회가 한미 FTA 비준안을 순조롭게 처리한다면 우리나라는 이르면 내년 상반기께 세계 최대 시장 EU, 그 뒤를 잇는 미국과 동시에 FTA를 실시하는 초유의 나라가 된다. 관세환급 이슈만을 남겨놓은 한ㆍEU FTA 협상도 다음달 타결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미국ㆍEU와 맺는 FTA는 경제적 효과도 크지만 욱일승천하는 중국을 견제할 확실한 카드인데다 일본과의 경쟁에서 차별화된 무기를 갖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무역투자실장은 “중국이나 일본은 그 자체로 경제규모가 커 상당 기간 미국ㆍEU와 FTA를 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경제뿐 아니라 정치ㆍ외교적 측면에서도 중ㆍ일을 견제하는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전세계적 경기침체 상황에서 보호무역주의를 깨는 선봉장 역할을 한국이 하고 있다는 호평 속에 미국과 유럽 국민들이 한국을 좀 더 친근하게 느끼는 계기로 국가 브랜드와 신인도 향상에도 기여할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미국에 넘긴 공이 돌아오지 않으면 정부와 여당은 재앙 수준의 정치적 부담을 지게 된다. 선비준을 적극 추진하다 마치 닭 쫓던 개처럼 처량한 신세가 된 당정을 여론이 그냥 둘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년부터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총선, 대선 등이 매년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재협상이나 추가 협상에 직면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가 “재협상을 할 바에는 그냥 미국에서 FTA가 죽도록 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국민을 설득할 재협상의 명분이 전무한 실정이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력에 사상 초유의 기회와 위기가 함께 걸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전망이다. ◇어떻게 돌파할까=한미 FTA 진전 여부의 직접적 열쇠는 미국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쇠고기와 자동차 이슈를 해결하는 것이다. 맥스 보커스 미 상원 재무위원장은 지난 20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한미 FTA의 조속한 처리를 당부하면서도 미 쇠고기의 완전 개방과 한국 자동차산업의 비관세 장벽 해소를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쇠고기 완전 개방은 한미 FTA와 직접 관련된 문제가 아니고 미국 측이 주장하는 자동차 교역 불균형을 초래하는 무역장벽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해야 하는 짐을 지고 있다. 특히 쇠고기와 자동차 문제를 재협상이나 추가 협상이 아닌 제3의 방식으로 매듭지어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한미 FTA가 동맹 강화에 기여하는 전략적 가치를 미 정가에 잘 설명해야 한다”며 “FTA는 당면한 중국 견제, 경제위기 돌파를 위한 협력, 북한의 위협과 테러에 대응한 국제공조 등에 있어 한미관계에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통상전문가는 “혹여 있을지 모를 중ㆍ일의 방해작전을 정보기관과 외교부가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 측과의 협의와 관련해 국내 대국민 여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불필요한 밀실협상 논란이 불거지지 않도록 미국 측과 협의과정을 투명하게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미 FTA에 대한 미국 측의 반발이 국민들에게 한미 FTA가 우리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고 상당한 이익을 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있다. 이준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미주팀장은 “한미 FTA가 촉발한 논란을 통해 국민에게 자유무역과 미국을 향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기회로 활용한다면 또 다른 실익을 얻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美행정부·의회 긍정 신호 잇따라 한미동맹등 중요성 부각… 美경제가 마지막 변수될듯 재협상을 공공연히 시사했던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여당인 민주당을 비롯한 의회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점진적으로 긍정적 신호를 보내며 하반기 비준 추진에 무게를 싣고 있다. 최근 미국 조야에서 한미 FTA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어 재협상 없이 비준 절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지만 여전히 불안한 미국 경제가 마지막 변수로 버티고 있다. 지난 3월9일 론 커크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의회 인사청문회에서 한미 FTA에 대해 '수용 불가' 입장을 내비쳐 최고조에 달했던 미국 측 반대 기류는 오바마 정부가 완전한 진용을 갖추면서 서서히 선회하는 추세다. 특히 4월 초 런던에서 열린 첫번째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 FTA와 관련, 오바마 대통령이 "FTA를 진전시킬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 최근 2~3주 사이 조기 비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18일 미국 통상전문지인 인사이드유에스트레이드는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관계자들이 한미 FTA가 올 가을 미 의회에서 비준되기를 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 행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라고 하지만 FTA에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던 오바마 행정부가 전향적으로 한미 FTA 조기 비준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북한의 로켓 발사 이후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변 상황이 한미 FTA의 중요성을 새삼 미 행정부에 각인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워싱턴 정가에서 나오고 있다. 의회에서 비준의 키를 쥐고 있는 미 상원 재무위원장과 야당 간사가 20일(현지시간) 한미 FTA를 조속히 해결하자고 촉구하고 나선 점도 고무적이다. 맥스 보커스 상원 재무위원장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동북아 지역의 위협에 맞서 미국이 한국과 강력한 동맹관계를 유지,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체 없이 한미 FTA가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어려운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달 한미 통상관계자 간 실무회담을 앞두고 커크 USTR 대표가 20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해 재협상 계획이 없다고 밝혀 국내에서 우려하는 재협상이나 추가 협상 없이 양측 간 조율이 이뤄질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미측은 지난 대선기간 중 NAFTA에 대해서도 재협상 추진을 암시해왔다. 다만 제너럴모터스(GM)의 파산 여부 등 여전히 불안한 미국 경제가 향후 한미 간 조율의 순항 여부와 조기 비준의 마지막 변수로 남아 있다는 게 통상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