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일본색 버리는 일본기업

연공서열 없애고 주주중심 경영 갈수록 늘어


日式 고용 모태 파나소닉까지 임금 차등지급 성과급제 도입

복수 사외이사제·경영공개 등 기업 지배구조도 크게 달라져


공동체 의식·조직 결집력 등 특유의 강점 사라져 부작용도


지난 9일 일본 최대 가전업체인 파나소닉이 전 임직원에 대해 연공서열제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10월부터 관리직에 대해 연공서열 대신 맡은 역할을 기준으로 임금을 차등 지급하고 있는 이 회사는 오는 4월부터 일반 사원들에게도 새로운 임금제도를 적용할 계획이다.

'일본식 경영'을 상징하는 연공서열은 이미 일본 대기업들 사이에서 '과거의 유물'이 되고 있다. 지난해 히타치제작소와 닛산 등이 관리직에 대한 성과급제 도입을 발표했으며 소니 등도 연공서열 폐지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파나소닉의 결정이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이 회사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로 대표되는 이른바 '일본식 고용'의 모태가 된 기업이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의 직원도 해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한 일본식 고용의 창시자, 고(故)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창립한 파나소닉(옛 마쓰시타전기)의 인사제도 혁신은 그만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일본 기업들 사이에서 특유의 '색깔', 즉 일본식 경영방식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는 장기 불황에 빠졌던 1990년대 후반부터 이미 시작된 현상이지만 아베 신조 정권이 해외투자 유치를 통한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정부 차원에서 '노동시장 유연화'와 '기업 거버넌스 강화'를 추진하면서 '일본색 벗기'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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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현상은 고용 관행의 변화다. 일본 최대 자동차업체인 도요타는 저출산 고령화 및 젊은 층의 생산직 기피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최근 26년 만에 생산직 임금체계를 개편, 젊은 인력에 대한 차등적인 처우 개선에 나섰다. '평생직장' 개념도 사라지면서 각 기업마다 실적이 부진한 사업 부문을 중심으로 한 인력 구조조정이 수시로 벌어진다. 장기 사업부진에 시달린 소니의 경우 올 회계연도(2014년4월~2015년3월)에 전 세계에서 5,000명, 일본 내에서만 1,500명의 감원을 단행하고 있다.

강력한 오너가 종업원들과 가족과 같은 관계를 구축했던 특유의 기업 지배구조(거버넌스)도 달라지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주주보다는 종업원·고객·거래처들과의 신뢰관계를 중시해왔으나 외국인 지분이 확대되고 투명성이 결여된 일본 식 거버넌스의 문제점이 불거지면서 주주가치를 최우선시하는 서구식 기업통치로 옮겨가고 있다. 2011년 카메라 제조업체인 올림푸스의 투자손실 은폐사건 등으로 문제시된 일본 기업의 폐쇄적인 지배구조는 아베 정권 들어 정부 주도 하에 복수 사외이사제 도입 등 서구식 지배구조로 탈바꿈하기 위해 수술대에 오른 상태다. 여기에 주식투자 비중을 대폭 확대한 일본 공적연금(GPIF)이 운용실적을 높이기 위해 기업들에 주주가치 제고를 강하게 요구하며 변화를 앞당기고 있다.

'일본색' 탈피는 과거 '메이드 인 재팬'의 신화를 일궜던 제조 현장에서도 두드러진다. 도요타는 올해부터 부품 공용화 프로젝트인 '도요타 뉴 글로벌 아키텍처(TNGA)'를 적용한 신형 자동차를 순차적으로 판매한다. 개발속도 단축과 원가절감을 위해 주요 부품을 공용화·표준화하는 이 방식은 글로벌 차업계의 트렌드로 도요타자동차를 필두로 하는 일본 제조업체의 '전통'을 완전히 뒤집는다.

일본 제조업은 전통적으로 '스리아와세', 즉 어떤 문제에 대해 서로 부딪치며 조정에 조정을 거듭해서 세밀하게 맞춰가는 과정을 강점으로 한다. 세밀한 조정을 통해 완성도 높은 제품을 만드는 이 '스리아와세' 공정이야말로 외국 제조업과 차별화된 '일본색'이다. 도요타의 TNGA는 이 '스리아와세'에서 탈피하는 제조업 공정의 일대 혁신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같은 일본 기업들의 변신은 글로벌 경쟁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글로벌 경쟁사들이 부품 모듈화를 통한 생산 효율화에 속도를 내는 와중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드는 '스리아와세'를 고집할 경우 빠르게 급변하는 시장을 따라갈 수 없다. 외국인 주주의 지분율이 높아지고 해외시장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투자금을 유치하고 글로벌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배구조와 연공서열 관행에서 탈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본 기업 특유의 강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수년 전부터 이어지는 자동차업계의 대규모 리콜 사태는 '눈빛만 봐도 아는' 계열 부품업체와의 오랜 협력 체계와 신중한 '스리아와세' 에서는 나오기 힘든 것이었고 대표 가전업체인 소니의 몰락은 1990년대 후반 경제적 부가가치(EVA) 개념을 도입한 서구식 경영으로의 이행에서 비롯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워크맨'과 같은 혁신 제품도 실패에는 관대한 기업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끈끈한 공동체 의식과 조직 내 결집력도 사라지고 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고유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따라 구축된 일본식 경영을 섣불리 버리면 부작용 역시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단순히 수치와 실적에 얽매이기보다는 특유의 강점을 글로벌 시대에 맞게 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경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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