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때 대형 IB마저 파산
국가 보증 정책금융 위상 강화
다양한 수출금융안 마련 박차 대형 플랜트 수주 등에 노하우
자원개발등 해외진출에도 심혈
자금확충 위해선 법개정 필요 김용환(사진) 수출입은행장은 지난달 주한 일본대사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드문 일이었다. 김 행장은 "수출입은행장이 주일대사 등 요직을 한꺼번에 만나는 경우는 드문데 공관으로 초청돼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이들이 나눈 대화의 주제는 정책금융기관의 수출금융과 관련해 한일 간 공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내용. 수출입은행이 아랍에미리트(UAE) 원전수출 등에 대한 자금공급을 맡으면서 일본 역시 우리의 수출입은행을 주목한 것이다. 김 행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외 대규모 프로젝트 시장에서 정책금융기관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고 수출금융의 패턴이 바뀐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말했다. 김 행장은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강렬하면서도 단순 명료한 화법으로 수출입은행의 달라진 모습을 전했다. 인터뷰는 그가 이명박 대통령을 수행해 아프리카로 떠나기 직전인 지난 4일 여의도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해외 프로젝트 '先금융 後수주'로 전환 2008년 글로벌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10억달러를 넘는 대규모 해외 프로젝트의 금융조달은 메릴린치나 JP모건 등 세계적인 투자은행(IB)의 독무대였다. 정책금융기관은 명함조차 내밀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책금융기관을 먼저 찾는다고 김 행장은 귀띔했다. "금융위기 때 대형 IB마저 파산하는 것을 보면서 발주처가 대형 IB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정책금융기관은 국가가 보증을 해주지 않습니까. 대규모 프로젝트는 중동이나 동남아, 아프리카 등의 정부가 발주하는데 이제 발주처들은 정책금융기관의 수출금융을 더 신뢰하는 듯합니다." 수주방식도 바뀌었다. '선 발주, 후 금융'이었던 것이 최근에는 '선 금융, 후 수주'로 바뀌고 있다. 프로젝트 수주에서 파이낸싱 플랜의 역할이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그는 "금융조달 능력이 수주 성공의 핵심 요인"이라면서 "국내 대형 조선소의 선박 수주 과정을 지켜보면 '금융'의 역할이 뚜렷해진다"고 말했다. 김 행장은 그래서 다양한 수출금융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수출입은행으로는 드물게 '글로벌 프로젝트 개발 및 금융조달 콘퍼런스'를 지난달 23일과 24일 이틀 연속 열었다. 김 행장은 "국제금융기구(MDB), 수출신용이관(ECA), IB 및 국제로펌 등 84개 기관의 200여명이 대거 참석해 성황리에 끝났다"고 웃음을 지었다. 지난달 24일에는 일본 국제협력은행(JBIC)과 공동세미나도 열었다. 양국 정부기관, SMBC, BTMU 등 주요 일본계 상업은행, 양국 주요 수출기업 등 60개 기관의 140여명이 참가, 해외 공동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었다. 김 행장은 "수출입은행이 많은 프로젝트파이낸싱 노하우를 갖고 있지만 이제는 한 기관만의 능력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해외프로젝트 시장에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면서 "국가 간의 금융협력이 아주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투자의 분산처럼 수출금융도 분산을 통해 기관도 발주처도 위험을 줄이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셈이다. 수출입은행에 절호의 기회가 오고 있다 김 행장은 인터뷰 내내 지금의 상황이 수출입은행에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물론 수출입은행은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기업의 대형 플랜트 수주와 해외 진출을 지원하면서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국내금융기관 중 IB 업무를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수은뿐이다. 아랍에미리트연합 원전수주 지원이 예다. 수은이 단독으로 대주단으로 참여하고 산업은행과 국내 시중은행은 하위 은행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포부는 더욱 높았다. 치밀하게 전략을 짜고 실행하지 않으면 표범도 사냥에 실패하듯 주어진 기회를 살려 수출금융을 대표하는 위상을 갖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수출입은행으로서는 처음으로 10년 비전을 밝힌 것도 그의 일환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수출입은행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난달 1일. 김 행장은 수출입은행 창립35주년에 맞춰 '수출금융 150조원, 글로벌 톱 3위의 수출신용기관, 글로벌 10대 PF 금융기관'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수출입은행 비전 2020'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먼저 자금여력을 끌어 올리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4월에는 정부로부터 대규모 해외 프로젝트 수주 지원을 위해 1조원의 현물출자를 받았다. 올해는 100억달러가량을 해외에서 자금 조달한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상반기에만 48억달러의 조달을 마쳤다. 800억엔 규모의 사무라이본드 발행에 성공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400억엔 정도 생각하고 발행을 추진했는데 워낙 자금이 몰려 그 규모가 두 배로 늘었습니다. 금리도 낮을 뿐더러 800억엔은 한국계 기관 발행물 중에서는 사상 최대 규모였어요." 하반기에도 50억달러 이상의 자금을 해외에서 조달한다. 공모채 25억달러, 사모채 및 뱅크론 25억달러 안팎으로 잡고 있다. 김 행장은 "공모채는 글로벌 본드를 약 15억~20억달러, 틈새시장 공모채권을 5억~10억달러, 사모채를 약 15억~20억달러, 뱅크론을 5억~10억달러가량으로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리스 등 재정위기가 다시 불거지면서 유럽 쪽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자금조달은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 진행할까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UAE 원전 관련 대주단 구성에 대해서는 "곧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자신했다. "7월 말이면 자금조달을 위한 대주단 구성이 다 끝날 것"이라면서 "필요자금의 절반 이상은 해외자본이 참여한다"고 말했다. "여신지원 150조원…중장기 비중, 녹색ㆍ자원개발 비중 늘릴 것" 여신지원 규모를 오는 2020년까지 150조원으로 늘리기는 하지만 지원 대상도 조정할 것이라고 김 행장은 설명했다. "(현재 지원 중인) 66조원은 규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대부분 플랜트나 선박 등에 쏠려 있습니다. 녹색산업이나 자원개발 관련 비중은 7.4%에 불과해 산업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요. 2020년까지 녹색 부문은 36%, 자원개발은 14%로 크게 늘릴 것입니다." 해외진출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국내기업과 함께 진출해 '윈윈' 효과를 보고 있는데 주로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가 그 대상이다. 5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수행, 콩고와 에티오피아도 다녀왔다. 성과도 있었다. 김 행장은 "수출입은행은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이용해 개발이 더딘 국가에 도로나 전력ㆍ수도 등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지원 사업을 하는데 이때 국내 기업들이 함께 진출해 자원개발 등의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에서 '자원개발ㆍSOC 건설 연계사업 협력 합의서'에 서명했고 에티오피아에서는 전력 및 도로 분야 사업과 같은 인프라 구축 사업에 아프리카개발은행(AfDB)과의 협조융자 사업 등을 포함한 EDCF업무협약도 체결했다. "자본확충 15조원 늘리고, 법 개정 필요" 수출입은행의 역할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본확충 필요하다. 이를 위해 수출입은행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김 행장은 강조했다. "수출입은행은 해외 대형 프로젝트 수주를 지원해야 하기 때문에 해외채권 발행 능력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금 규모가 커야 하는데 현재 8조원에 불과합니다. 산은·정책금융공사의 자본금은 15조원, 기업은행은 10조원에 비해 턱 없이 적습니다." 회사명도 바꾼다. '한국수출입은행' 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기능을 모두 담지 못해서다. 김 행장은 "해외에서 영문약자를 많이 쓰다 보니 수은을 국내 시중은행들과 혼동하고는 한다. 외환은행의 약자인 KEB, KB국민은행의 약자인 'KB'와 수은을 헷갈려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김 행장은 이름을 공모해서 4개 정도로 압축했지만 "뭔가 느낌이 오는 것은 없어서 더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감자인 정책금융기관간 재편 논의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예민함을 감안해 김 행장은 "당사자인 만큼 말을 아끼는 게 좋다"고 했다. 다만 전문가들이 대외 정책금융 지원을 수출입은행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 무역보험공사와 수출입은행 업무는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는 수준에서 넌지시 구조조정의 방향을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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