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귀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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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홍성 새조개 샤부샤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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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절강성 항주(杭州)에서 서호(西湖)를 관광한 사람들은 꼭 동파육을 먹는다. 동파육은 송나라 최고의 시인이었던 동파 소 식이 만든 항주 명물 요리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항주 태수로 부임한 소동파는 폐허가 된 서호를 준설했다. 이에 감격한 백성들이 보내온 돼지고기에 소동파는 미식가의 재능을 발휘,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술과 양념을 넣어 요리를 만들었고 이 요리가 후일 동파육이 됐다.
한국음식 세계화 하려면 와인처럼 스토리텔링 마케팅 필수
풍년기원'선농탕' 전쟁 음식'진주 비빔밥' 등 좋은 소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드림 소사이어티'의 저자이자 미래학자인 롤프 옌센은 제품에 꿈과 감성, 스토리를 담아 차별화해야 하며 한국의 경우 전통 음식인 김치에도 스토리를 접목해 프랑스 와인처럼 마케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프랑스의 와인이 수많은 재배 지역과 빈티지 등의 스토리를 가진 것처럼 한국의 김치도 특정 농가에서 특정 장인이 만들었고 어떤 비법을 사용했다고 밝히는등 스토리를 넣어 높은 가격에 팔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식 세계화가 국내 관광 및 식품업계의 화두로 떠오르는 가운데 한 나라나 한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 고부가가치의 관광상품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최근 '우리 고장 맛 이야기'라는 책자를 펴내 전국을 대표하는 음식들의 스토리텔링 마케팅에 나섰다. 전국 방방곡곡의 음식들이 어떤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고장의 명물이 됐는지 알고 먹으면 또한 더 기쁘지 않을까.
▦ 수원 왕갈비= 수원이 갈비의 고장으로 유명해진 것은 1940년대까지 수원에 있던 전국 최대의 우시장 덕분이다. 조선 정조가 시행했던 화성 축성이 수원 우시장의 발달 배경이 됐다. 당시 조선은 농사에 없어서는 안될 소 도축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엄청난 규모의 화성을 쌓아올리는 공사에는 인부들의 건강한 체력이 필요했기에 정부는 화성에서만큼은 소 도축을 허용했던 것.
해방 무렵 '화춘옥'이라는 해장국집에서는 해장국에 갈비를 넣어주는 것으로 인기를 끌고 시작했는데 한 손님이 큰 갈비를 국물에 넣지 말고 따로 불에 구워먹어 보자고 제안해 숯불에 굽기도 하고 양념도 바꿔보다 1956년 수원갈비가 판매됐다. 수원갈비는 한 대에 15cm 이상 크기로 푸짐해 왕갈비라는 이름은 얻었다. 장택상 전 수도경찰청장이자 국회의원은 사흘이 멀다 하고 방문했으며 197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이 자주 찾으면서 유명해졌다.
▦ 서울 설렁탕=해마다 조선의 왕들은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낸후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모는등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을 했다. 중국 신화에서 처음으로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전해지는 신농씨와 후직에게 올리는 제사인 선농단 행사는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보다 많은 백성들에게 쇠고기를 먹이기 위해 고기를 넣은 솥에 물을 가득 붓고 국을 끓였는데 이 국을 '선농탕'이라 불렀다. 선농탕이 백성들 사이에 구전되면서 설롱탕, 지금의 설렁탕으로 바뀌었다.
이후 농민들은 부족한 살코기 대신 소머리, 도가니, 우족 등을 넣고 삶았는데 저렴한 가격에 고깃국을 먹을수 있는 설렁탕은 대중음식으로 인기를 끌게 됐다.
▦ 강릉 초당순두부=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가 좌천돼 강릉부사로 내려왔다. 그는 근심도 달래고 머리도 식힐 겸 관청 뜰에 있는 우물물을 떠다 마시곤 했는데 평소 두부를 좋아하던 그는 물맛이 좋아 두부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허엽은 두부를 만들었다. 끓인 콩물을 응고시키려면 간수를 넣어야 했지만 강릉에는 천일염이 나지 않아 동해 바닷물을 길어다 썼다. 강릉부사가 손수 만든 두부가 담백하고 고소해 맛있다는 소문이 났고 그 후 강릉 사람들은 허엽의 호인 초당을 붙여 초당두부라고 불렀다. 초당마을은 두부마을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 삼척 곰치국= 50여년전 동해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길이가 1m쯤 되는 거무스레한 물고기를 발견했다. 물고기 모습이 마치 곰처럼 생겨 곰치라는 이름이 붙은 이 물고기는 처음엔 생김새와 흐물거리는 살 때문에 그물에 걸리는 즉시 바다에 던져졌다.
천대받던 곰치가 생선 대접을 받고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은 뱃사람들 덕분이다. 술을 위안거리로 삼았던 뱃사람들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아침이면 속을 달래기 위해 팔지 못하는 곰치로 국을 끓여먹기 시작했던 것. 순두부처럼 연한 살의 곰치국은 속을 시원하게 풀어줘 숙취 해소에 최고였다. 그후 삼척에서 입소문이 퍼지며 곰치국은 겨울철 해장국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 정선 곤드레나물밥=첩첩산중 두메산골 정선은 쌀이 귀해 산나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마을 산언저리에서 흔히 볼수 있는 풀에 쌀을 섞어 끓인 죽을 많이 먹었는데 이 풀이 곤드레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꼭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 하는 사람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어린시절 배고픔을 잊기 위해 먹었던 곤드레가 세월이 흐르자 그리운 음식으로 남아 곤드레밥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생겨났다. 정식 이름이 고려엉겅퀴인 곤드레는 엉겅퀴와 비슷하지만 가시가 없고 단백질, 칼슘, 비타민이 고루 들어있다. 특히 최근엔 당뇨, 고혈압 등 성인병에 좋은 약초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 아구찜=예로부터 어부들은 흉측하게 생긴 아귀를 재수없다고 여겨 그물에 잡혀도 바로 버렸다. 그런 아귀가 불과 40여년전 경남 마산에서 생선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한 가난한 어부는 마산 오동동 한 선술집 할머니에게 직접 잡은 아귀를 들고와 요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귀를 내팽개쳤는데 한달 후 밤늦게 찾아온 손님에게 낼 술안주가 없어 재료를 찾던 할머니는 주방 한구석에 있는 아귀를 발견했다. 급한 대로 고추장, 된장, 파, 마늘로 양념하고 콩나물, 미나리, 미더덕을 곁들여 쪄냈다. 한달간 겨울바람을 맞아 얼고 녹기를 반복한 아귀는 살이 꼬들꼬들해져 씹는 맛이 일품이었다. 천덕꾸러기 아귀로 만든 임시방편 요리가 명물로 탄생한 순간이었다. 마산에서는 생 아귀가 아닌 말린 아귀를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 진주 육회비빔밥=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싸움은 12만 왜군의 공격을 7만명의 진주성 민ㆍ관ㆍ군이 힘을 합쳐 대적한 사투였다. 진주성 싸움의 과정에서 진주 육회비빔밥의 역사도 함께 시작됐다.
연일 싸움을 계속하는 군사들을 위해 부녀자들이 밥을 지어 날랐는데 일촉즉발 전쟁터에서 밥과 반찬을 따로 챙겨주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밥 위에 각종 나물을 얹었다. 하지만 병사들에게 나물만 먹일 수는 없어 갓 잡은 소의 싱싱한 살코기를 잘게 썰어 나물과 함께 비벼준 육회비빔밥은 진주성 싸움의 '숨은 공신'으로 불리고 있다.
▦ 천안 병천 순대국밥=6ㆍ25 전쟁후 병천에 서양식 햄 공장이 들어섰다. 돼지고기를 가공한 후 생긴 부산물을 활용해 돼지창자에 선지, 채소 등을 넣은 순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병천장에서는 장날마다 돼지 뼈를 뽀얗게 우려낸 국물에 순대를 썰어넣은 순대국밥을 팔았다. 내용물이 풍성해 누린내가 거의 나지 않고 속재료가 푸짐한 병천장의 순대국밥은 장날의 명물이 됐다. 90년대 중반에는 장날뿐아니라 아예 상시영업을 하는 집들이 생겨났으며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프랜차이즈로 전국에 퍼져나갔다.
▦ 충남 홍성 새조개 샤부샤부= 조개 중에서도 귀족조개, 황금 조개라 불리는 명품이 있다. 천연기념물인 검은머리물떼새는 이것을 하루에 수십개씩 먹어치운다. 일본 미식가들은 이것을 한번에 먹기 너무 아까워 입안에 넣었다 뺐다 한다는 말까지 있다. 새조개 얘기다. 속살이 새 부리를 닮았다고 해 새조개라 이름붙여졌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천수만에는 새조개가 없었는데 84년 간척사업으로 천수만 북단에 모래가 생기면서 새조개의 생존 환경이 만들어졌다. 천수만 방조제 공사후 한 어부가 우연히 새조개를 잡았는데 처음엔 뭔지 몰라 다 버렸다. 그러다 일본에서 최고의 초밥재료로 쓰인다는 소문이 나면서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됐다.
90년대 후반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먹기 시작해 요즘은 없어서 못팔 정도가 됐다. 살이 연하고 부드러워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샤부샤부로 먹는 게 좋다.
▦ 신안 홍어삼합= 신안군 흑산도 하면 홍어, 홍어 하면 삭힌 맛이다. 본래 싱싱한 회로 먹던 홍어를 미처 팔지 못한 장수가 어느날 남은 홍어를 맛봤더니 시간이 지났는데도 물러지지 않고 오히려 톡 쏘는 삭힌 맛이 묘해 그 후부터 삭혀먹게 됐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이렇게 삭힌 홍어에 돼지고기와 김치를 얹어 먹는 것을 삼합이라고 하는데 삼합의 탄생에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전라도 잔치에선 홍어가 최고 인기 메뉴였지만 값이 비싼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잔치 손님들은 귀한 홍어만 집어먹으면 염치없어 보일까봐 눈치 봐가며 돼지고기와 김치도 함께 집어먹었는데 먹다 보니 궁합이 절묘해 삼합이란 메뉴가 등장했다고 한다.
▦ 영광 굴비정식=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이라는 야심 많은 인물이 왕의 자리를 넘보고 급기야 임금을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해 정주(지금의 영광)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 이곳에서 소금에 절여 해풍에 말린 조기 맛을 보고 감탄한 이자겸은 조기를 정성껏 담아 임금에게 보내면서 정주굴비(靜州屈非)라 써 보냈다.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보내는 것일뿐 '뜻은 굽히지 않았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때부터 영광의 말린 조기는 굴비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영광 굴비가 유명한 이유는 이자겸 때문만은 아니다. 조기는 제주 남서쪽에서 겨울을 나고 산란을 하기 위해 서해로 이동하는데 법성포 앞 칠산 바다를 지날 때 살이 가장 통통하고 알도 꽉 들어찬다고 한다. 법성포 식당들은 처음엔 굴비 백반 위주였으나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후 외지인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반찬수가 늘어 정식으로 탈바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