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4월 10일] 실용의 적

대궐 같은 집이 있는데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 잔디밭과 정원이 버티고 있고 사람이 다니는 길은 담벼락 밑으로 꾸불꾸불 나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다. 다시 말해 조잡스러운 조형물이나 바위 덩어리 같이 별 가치 없는 것들을 모셔놓기 위해 사람이 이용하는 길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잔디밭이나 정원을 가로질러 가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 마련이다. 편리하고 시간도 절약되기 때문이다. 만약 제지가 없다면 사람들은 불편하게 만들어놓은 길을 이용하는 대신 정원을 가로질러 다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본래 만들어놓은 길은 이용되지 않고 정원 가운데 자연스레 새 길이 생기게 될 것이다. 여기서 미국의 어느 학자는 ‘사람들이 다니고 싶어 하는 곳으로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 곧 실용주의’라고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서 사람이 중심이고 사람에게 이롭고 편리한 것이 곧 실용주의라는 것이다. 실용 또는 실용주의가 무엇이냐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시대상황이나 쓰이는 분야에 따라 내용이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국을 개혁ㆍ개방으로 이끈 덩 샤오핑(鄧小平)의 유명한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은 실용주의가 통치이념화된 경우이다.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패색이 짙어진 공산주의 이념이나 사상의 노예에서 벗어나 인민이 잘 먹고 잘사는 나라로 만들자는 것이었고 오늘날 중국이 세계의 중심축으로 부상하는 밑거름이 됐다. 양반들의 공허한 탁상공론을 배격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학문을 주창한 실사구시(實事求是)도 마찬가지다. 이런 역사적인 사례가 아니라도 많은 선진국에서는 정권과는 상관없이 실용주의가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사람에게 얼마나 이롭고 편리하냐가 모든 일의 타당성이나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 셈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제도나 시스템이 편리하면서 효율적인 것은 사람을 위한 실용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당초 ‘실용정부’로 부르는 것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감이 다소 어색해 포기한 것 같지만 이명박 정부의 색깔과 정책기조에는 실용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는 느낌을 준다. 대불공단의 전봇대를 단번에 뽑아버린 것이나 사전에 짜놓은 각본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국정을 수행하는 방식 등은 모두 실용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치ㆍ경제ㆍ사회 각 분야에 잔뜩 쌓여 있는 거품과 비효율ㆍ낭비를 걷어내고 경쟁력 있는 선진 민주사회를 만들기 위해 한번쯤 실용주의라는 잣대로 행하는 과감한 진단과 대대적 정비가 절실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공공ㆍ민간 가릴 것 없이 실용의 적(敵)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가령 공공 부문의 경우 후진적인 정치수준, 뿌리 깊은 관료주의, 극단적인 정권교체, 외환위기와 같은 국난 등 어지러운 과정을 거치면서 중앙ㆍ지방 할 것 없이 국적불명ㆍ목적불명의 제도와 법규, 사업들이 무질서하게 뒤얽혀 있다. 공약의 단골메뉴인 규제문제만 해도 그렇다. 세계 어느 나라나 건축ㆍ환경ㆍ안전ㆍ토지 등과 관련해 규제는 있다. 문제는 선진국에서는 적은 인력과 비용으로 높은 규제효과를 거두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감독자들이 득실대지만 규제효과는 제대로 거두지 못하면서 사회적 비용만 높인다는 점이다. 한때 선진국의 원스톱(one-stop)제도를 흉내내기도 했지만 결국 ‘원모어(one-more)서비스’라는 비아냥만 받고 흐지부지됐다. 사람, 곧 국민의 시간과 돈을 아끼고 편리하게 하려는 실용주의 정신은 없고 규제자ㆍ감독자 중심의 관료주의적 행정편의주의가 근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관청마다 걸려 있는 유치한 구호들,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거나 자신의 정치적 인기관리를 위한 전시행정과 고질적인 예산낭비도 실용의 적들이긴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초 공직자들에게 국민을 위한 머슴 역할을 주문했다. 그것은 민(民)이 갑(甲)의 위치가 되고 관(官)이 을(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잘못 설계된 정원을 뜯어고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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