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목요일 아침에] 개혁의 승률

박시룡 논설실장

지난 90년대 초 김영삼 정부 때 ‘개혁피로증’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고되고 치열한 정치투쟁을 거쳐 집권에 성공한 문민정부는 출범하자마자 각종 개혁작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문민의 눈으로 보면 오랜 기간에 걸친 군사정권 시절에 형성된 제도와 관행 대부분이 개혁의 대상으로 비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개혁작업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경제사정이 좋지 않자 개혁을 감당할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고민하던 문민정부는 개혁을 잠시 미루고 ‘경제회복 100일 계획’이라는 비상대책을 마련했다. 경제개발계획을 개발연대의 유산이라며 용도 폐기했던 문민정부가 경제활성화를 위해 마치 군사작전이라도 하듯 비상계획을 내놓은 것은 아이러니였다. 경제도 살려가면서 개혁을 추진하려는 현실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개혁바람에 상당한 염증을 보였다. 세계화를 앞세우고 쉴새 없이 몰아치는 개혁의 폭과 속도를 감당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비전이 분명하지 않았거나 새로운 성장동력의 창출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문민정부의 개혁은 아쉽게도 외환위기라는 충격을 맞고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 불만 쌓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혁에는 저항과 갈등이 따르게 마련이다. 참여정부의 개혁 역시 혼란과 갈등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개혁의 당위성을 따지기 전에 일반 국민들의 불만은 무엇보다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데서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참여정부 이후의 경기침체가 과거 국민의 정부 시절에 양산된 신용불량자와 과도한 가계부채 등으로 소비여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라 해도 당장 살기가 어려워진 국민의 불만은 현 정부에 집중되게 마련이다. 부동산투기억제와 성매매금지법만 해도 그렇다. 부동산투기와 높은 부동산가격은 개발연대 이후 최대 고질병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때 부동산실명제와 토지공개념이 도입되기도 했지만 부동산불패신화를 깨지는 못했다. 그러나 부동산가격이 치솟고 덩달아 임금과 물가가 오르는 인플레적 성장방식은 언젠가 거품이 꺼지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는 사실을 일본의 장기불황은 잘 보여준다. 부동산투기억제의 이 같은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부동산경기가 단기간에 급속히 냉각되다 보니 장기간 부동산본위경제에 익숙해진 구조에서 비명소리가 안 날 수 없다. 경제도 중요하지만 그 규모가 농림어업보다도 더 비대해진 성매매와 퇴폐향락산업을 더이상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막대한 인적ㆍ물적 자원을 퇴폐향락에 탕진하는 경제가 얼마나 굴러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건전한 가치관이 없는 사회가 선진국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기업형 향락산업보다는 생계형으로 불리는 집창촌부터 일시에 황폐화시키는 방식은 다분히 전시행정이라는 인상을 준다. 사회악에 대해 일정지역을 정해주고 더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선진국들의 봉쇄정책(contamination policy)과는 퍽 대조적이다. 성장산업 창출로 돌파구 열어야 건전성이나 효율성 같은 잣대를 잠시 밀쳐놓으면 이들은 모두 성장산업군에 속했다. 수 십년 동안 성장을 구가하던 산업들이 한꺼번에 타격을 받으니 먹고 살기가 어렵다는 불만이 안 생길 수 없다. 당장 경제가 어렵더라도 개혁을 밀고나갈 것인지 말 것인지는 집권층의 선택이다. 경제위기론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참여정부도 ‘한국형 빅딜’을 거론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빠지는 경제에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개혁의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는 데 비해 개혁에 따른 고통은 당장 나타난다는 데 개혁의 어려움이 있다. 개혁에 대한 불만을 덜기 위해서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해 틀어막힌 인적ㆍ물적 자원이 보다 생산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개혁피로증을 극복하고 개혁의 승률도 높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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