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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이모(26)씨는 최근 황금연휴를 대전의 부모님 집에서 보냈다. 원래 예정했던 친구들과의 2박3일 여행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이씨가 친구 대신 가족과의 시간을 선택한 것은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컸다. 이씨는 "여행지에서의 휴식도 좋지만 평소 바쁘다는 핑계로 보지 못하던 가족과 이럴 때라도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가족을 잃은 슬픔에 힘겨워하는 유가족들을 TV로 접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 것 같다"고 고백했다. 서울에 사는 가족과 떨어져 충청도에서 자취를 하는 대학생 최모(21)씨는 최근 부모님과의 통화가 늘었다. 최씨는 "전에는 용돈이 모자랄 때나 부모님께 연락을 했는데 요즘에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전화를 하곤 한다"며 "지금의 평범함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사고가 난 지 한 달이 지나면서 시민들의 일상이 바뀌고 있다. 참사에 대한 슬픔은 가족에 대한 애틋함으로, 안전에 대한 불안감은 개선책 마련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재난 분야 봉사단체인 안전모니터봉사단 중앙회에 따르면 지난달 세월호 사건 이후 도로 파손이나 제방 붕괴위험 등 생활 속 재해재난 위험요소에 대한 신고건수가 두 배가량 늘었다. 지난달 중순 이전까지만 해도 하루 평균 100여건에 그쳤던 신고건수가 세월호 사고 이후 하루 200여건으로 늘어난 것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활동 중인 안전모니터봉사단의 가입회원 수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자원봉사 형태로 활동하는 안전모니터봉사단은 생활 주변의 각종 위험요소를 봉사단 홈페이지(www.sfetyguard.kr)를 통해 신고하면 이후 위험요소지역의 해당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처리하고 그 조치 결과를 사진 등으로 공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 때문에 안전모니터봉사단에는 주로 파손된 도로나 보도블록 교체, 교통사고 위험이 큰 곳에 교통표지판 설치, 붕괴위험이 있는 담이나 제방 수리 등에 관한 신고가 주로 접수되고 있다. 안전모니터봉사단 중앙회 관계자는 "세월호 사고 이후 일반 시민들의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회원들의 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지고 있다"며 "재난과 재해로부터 스스로 지켜나가겠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언제 나에게도 사고가 닥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다중이용시설에 기재된 비상시 대피요령에 관심을 갖는 시민들도 부쩍 늘고 있다.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 안모(26)씨는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던 비상시 탈출대피요령을 외우기 시작했다. 긴박한 상황이 터졌을 때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안씨는 "최근 세월호 참사와 지하철 사고 등이 터지면서 불안감에 꼼꼼히 대피요령을 보게 된다"며 "과거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지금처럼 외웠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김모(22)씨는 영화 시작 전 나오는 비상시 대피로 안내영상을 꼼꼼히 챙겨본다. 김씨는 "이전에는 설마 저걸 쓸 일이 있겠나 싶어 신경 쓰지 않았는데 세월호 사고 이후에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무시할 수 없게 됐다"며 "물론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전처럼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세월호 여파는 대학가로도 퍼지고 있다. 대학생들은 즐기는 것만이 전부라고 여겼던 축제를 일상을 되돌아 보는 계기로 삼고 있다. 연세대는 소비적이며 즐기는 데 급급했던 기존의 축제에서 벗어나 다른 형태의 축제를 진행하기로 했다. 연세대 총학생회는 "본래 대동(大同)제는 지성인으로서 대동의 올바른 가치를 실현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수많은 문제들을 바라보고 더 나은 사회를 '즐거움'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본래의 의미를 잘 살리지 못한 채 진행돼왔다"며 "사회적 의미를 상실했던 축제가 대동제의 본질로 돌아와 서로를 보듬고 학생과 지역, 국가 공동체에 바람직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총학생회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이를 위해 연세대는 이번 축제에 설치되는 모든 부스에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단체나 의미 있는 시민단체 등을 후원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할 계획이다. 이 밖에 일부 대학은 축제를 완전히 취소하고 보다 의미 있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한성대는 축제 대신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모금행사를 진행했으며 동덕여대도 오는 21일 예정된 축제를 취소하고 모금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참사로 인한 불안감이 이 같은 행동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월호 참사가 터지자마자 시민들이 했던 말이 남의 말 듣지 말고 각자 살길을 도모하자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일 정도로 시민들의 사회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며 "결국 믿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위험상황이 오면 나와 내 가족이 알아서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탈출요령 숙지나 안부전화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 교수는 "사실상 전 국민이 장례를 치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지 않느냐"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진 것에 대해 처절하게 반성하고 그 뒤에 국민들의 자신감과 신뢰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