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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5월 초 사석에서 조직이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임원들이 나서지 않는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당시는 저축은행 구조조정 발표 이후 금감독이 관리ㆍ감독을 제대로 못했다고 여론의 화살이 빗발치던 때였다. 금감원에 대한 외부의 오해를 풀고 이해를 돕기 위해 전방위로 뛰는 사람이 적다는 불만이었다.
실제로 금융회사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다 보니 '절대 갑(甲)'으로만 행세해온 금감원 임직원들에게 '을(乙)'의 자리에서 외부의 시각을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외부에서 영입된 한 고위 간부는 2년 이상 금감원에서 근무하면서 부하 직원으로부터 대외활동에 대한 조언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할 정도다.
지금 금융당국이 위기에 처한 것은 이런 누적된 모습들이 표출된 결과다. 정권 말 레임덕이 생기면 으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지만 동시다발적이고 위태로운 수준이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전격적인 은행ㆍ증권사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조작 현장조사로 인해 금융위원회와 금감원 모두 수세에 몰린 상황이기는 하다. 하지만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금융당국이 뒷북 대응과 땜질식 처방, 오락가락하는 정책방향으로 위기를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일이 터져야 움직이는 뒷북 대응=4월 이후 3개월간 꿈쩍도 하지 않던 CD금리는 공정위가 담합조사에 나서자 곧장 하락세로 꺾였다. 감독당국의 입장과 움직임에 따라 시장이 얼마나 기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준다. 뒤집어 말하면 금융위와 금감원이 무려 324조원에 이르는 CD금리 시장에 대해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뒷북 대응은 처음이 아니다. 3월 금감원은 손해보험사들이 실손의료보험료를 대폭 인상할 계획을 밝히자 뒤늦게 경위를 파악하고 보험료 인하지도에 나섰다. 또 은행의 신용대출금리가 이미 급등한 뒤 일제히 현장검사에 나서는 등 시장보다 한발 늦게 대응했다.
시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다 보니 대응책도 부실할 수밖에 없다. 시간에 쫓기는 과정에서 문제가 터진 뒤 사후약방문 격으로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되는 과정이 반복됐다.
이렇다 보니 금융위와 금감원이 참가하는 TF 숫자만도 이미 수십 개에 이르게 됐고 개중에는 결론도 없고 목적도 불분명한 TF도 생겨났다. 보험업계의 한 관계자는 "우선 TF라는 것부터 만들어놓고 결국 면피를 하겠다는 뜻 아니냐"고 비판했다.
◇저축은행 비리 연루되며 도덕성 타격=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검찰조사에서 감독당국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신뢰가 생명인 금융위와 금감원이 갖춰야 할 최대 덕목인 도덕성에도 금이 갔다. 지난해 김광수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이 구속되는 충격을 겪었음에도 이번 저축은행 사태에서 또다시 다수의 직원들이 돈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런 와중에 직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대규모 저축은행 구조조정을 겪으며 직원들이 외부시선에 많이 위축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이 금융권에 휘두를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인 '검사권'도 분산됐다. 한국은행이 '금융시장 안정'을 들어 금감원에 공동검사를 요청할 수 있게 됐고 실제 4월 KBㆍ우리ㆍ신한ㆍ하나ㆍ기업ㆍ씨티ㆍSC 등 7개 시중은행 가계부채 실태에 대한 공동검사를 벌였다. 예금보험공사는 저축은행에 대한 단독조사권을 따냈다. 부실이 우려되는 저축은행에 대해 사전적인 조사에 나선다는 명분이지만 금감원을 거치지 않고도 금융회사 정보를 직접 얻어낼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 셈이다. 예보는 지난달 시작했던 3개 저축은행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했다.
◇계속되는 오락가락=금감원의 대표적 실책으로 꼽히는 것은 IC카드 전환정책이다. 오락가락하는 과정에서 시장의 혼선을 가중시켰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마그네틱카드는 3월부터 ATMㆍCD기를 통한 현금인출이 금지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은행 창구에 일대 혼란이 일자 금감원은 일정을 2개월 뒤인 5월로 미뤘고 다시 오는 2015년 1월로 대폭 연기했다. 실제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행정편의주의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는 질타가 이어졌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금융위와 금감원이 업계의 이익에 함몰돼 감독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판단기준이 국민이 아닌 금융회사로 치우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