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회장] 25. 일희일비(一喜一悲)

정부가 추진했던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가 나타나면서 한국사회는 신흥 공업국으로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타게 됐다. 산업현장에는 인력의 수요가 많아지고 임금역시 해마다 크게 인상됐다. 그러나 다른 산업에 비해 출판계는 노동 집약적인 수공업 생산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조판이나 인쇄, 제본 등에 종사하던 기능 인력들이 임금이 높은 업종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출판사들도 영업이나 편집부문의 인력이동이 많아 운영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보니 인쇄ㆍ제본업계는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들을 붙잡기 위해 임금을 인상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건비 인상은 결국 책값 인상으로 이어졌다. 예림당도 책값을 올리기는 했지만 `좋은 책을 저렴하게 공급한다`는 창립초기 기본철학을 지키기 위해 원가절감을 위한 방안을 찾으며 다각도로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예림당의 책값은 곧 아동도서의 책값을 매기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불황 속에서도 예림당은 여전히 신간개발에 적극적이어서 거래하던 제본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몇 군데를 더 거래하기도 했지만 필요 분량을 제때 소화해내지 못해 원활하게 공급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생각 끝에 제본소와 인쇄소를 직접 운영해 보자는 결론을 내리고 우선 제본소를 내 자형에게 맡아서 운영해 볼 것을 권했다. 1978년 11월 마포구 공덕동에 `예림제책사` 를 설립하고 12월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경력 있는 공장장을 두고 직원들은 50명정도 확보했다. 지금이야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하루에 수만권씩이라도 인쇄와 제본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지만 당시 제본은 숙달된 단순노동이 필요했다. 제본을 잘 아는 공장장까지 있었지만 처음 낸 동화책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표지에는 풀이 묻어 있고 형태가 비틀어진 것도 많아 많은 분량을 폐기했다. 한 달쯤 지나 제본 라인이 안정될 무렵 뜻하지 않는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아버지를 도와 제본소 일을 하던 조카가 재단기를 사용하다 손가락 10개를 잃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밖에서 일을 보다 사고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자형에게 잘려진 손가락을 수습해 조카와 경희의료원에서 만나자고 한 후 처리 중이던 업무를 중단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서는 접합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다른 곳에 알아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신설동에 있는 동서울병원에 입원시켜 기본적인 치료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성한 아들이 손가락 열 개를 잃었으니 누님과 자형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병원 침대에 누운 아들을 보며 한탄하던 자형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손가락이 없으니 어떤 여자가 시집을 오겠는가?”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는 나의 심정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한창 나이의 조카였다. `인생을 꽃피울 나이에 손가락이 없는 몸이 됐으니 앞으로 이 노릇을 어찌할까? 그러나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한들 당사자의 절망감에 비길까.` 큰 상실감에 한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다행히 조카는 안정을 되찾고 아버지를 돕다가 뒤를 이어 제본소 운영을 맡았다. 그리고 참한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녀도 두었다. 예림제책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술이 향상되어 후일 예림당의 `이야기극장` 시리즈가 나올 때는 하루 7,000여부까지 뽑아내고 고급 제본인 양장본 전문으로 하여 다른 회사 외주도 많이 받았다. 그 후 10여년 만에 운영권을 공장장에게 넘기고 손을 떼게 되었지만 예림당과는 협력업체로서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장ㆍ예림 경기식물원이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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