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산책] 지도자는 詩心을 가져야

김근<서강대교수ㆍ중국문화전공>

현대는 가히 서사(敍事)의 시대라 부를 만하다. 대중매체는 이야기와 이야기꾼들이 지배하고 시내의 간판은 서술체 상호가 눈길을 끈다. 대학에서는 시학 강의가 수강생을 못 채워 폐강되는 일이 더 이상 교무회의 안건으로 다뤄지지 않은 지도 이미 오래됐다. 인간의 행위 이면에는 이를 움직이는 무의식적 틀이 있다는 프로이트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현대문화의 이면에는 서술체 언어라는 틀이 자리 잡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서술체로 말할 때에는 지시하고자 하는 대상에 초점을 맞춰 말한다. 詩는 인격을 바로잡아주는 틀 따라서 말하고자 하는 대상만 정확히 지적되면 그것을 어떻게 말하든 방식은 상관없다고 믿는다. 인터넷상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퍼져서 무고하게 피해를 당하는 사건들은 바로 이런 잘못된 믿음에서 기인한다. 이에 비해서 시는 대상의 존재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언어의 표현에만 관심을 둔다. 즉 ‘무엇을’보다는 ‘어떻게’ 말하는가를 가지고 고심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해서 다르고 ‘어’해서 다르다”는 속담처럼 대상이란 말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말을 더욱 다듬게 하고 조심하게 한다. 그렇다면 시는 정형외과의 보정기구가 환자의 뼈대를 바로잡아주는 것처럼 우리의 인격을 바로잡아주는 틀이 아닌가. 이러한 효과를 옛날 중국에서는 시교(詩敎)라고 불렀다. 시가 이렇게 존재보다는 표현에 관심을 갖다 보니 시를 많이 읽으면 상상력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간 발견하지 못했던 존재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배우고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시적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배움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시골 할머니의 극히 평범한 말이 가끔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식사 중에 방문자가 찾아오면 밥을 먹었느냐고 물어보고 말만이라도 같이 먹자고 권하는 관습은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을 비벼가며 기원하는 어머니 모습처럼 시적 퍼포먼스에 속한다. 효율을 중시하는 산업사회를 겪으면서 우리는 표현은 무시하고 대상과 목표만을 보도록 훈련을 받아왔다. 꿩 잡는 게 매라고 했던가. 이런 환경에서는 자연히 ‘어떻게’보다는 ‘무엇을’ 가리키느냐가 중요하게 되고 따라서 시보다는 대상을 겨냥하는 듯한 서술체와 서사가 문화의 중심에 들어선다. 어떻게든 ‘꿩’만 잡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말에 문법이 사라진 지 오랜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한탄하고 있는 족집게문화의 근원이다. 이제는 주지도 않을 밥을 같이 먹자고 하는 빈말이나 될 성 싶지도 않은 일에 정화수를 떠놓고 기원하는 시적 퍼포먼스는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다. 한시라도 빨리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으면 될 것을 말이다. 여기에 상상력과 감수성이 개입할 틈은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는 '어떻게'가 중요 지도자는 시심(詩心)을 가져야 큰일을 한다. 뭇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비전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발견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릴 적 지었다는 동시를 보면 그의 장래가 예견되는 듯하다. 고 정주영씨는 시를 지은 적은 없지만 그의 상상력은 시인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점점 시를 잃어가고 있다. 아니, 인간에게 시적 욕구가 없을 수는 없으니 잃어가고 있다는 표현보다는 정치가와 장사꾼들의 이익에 휘둘려서 발정 난 동물의 억제되지 않은 감성표현으로 왜곡돼가고 있다고 쓰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제 와서 옛날 과거제도로 돌아가자고 말한다면 분명 시대착오를 면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왜 우리 선조들이 시로써 지도자와 고급관리를 선발했는지는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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