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사무직이 봉인 세상

예순살 정년 무색한 '파리 목숨'

직장서 항변도 못하고 냉가슴만 백수보단 낫겠지만 종이 한장차



전에는 친구든 지인이든 또래를 만나 저녁이라도 함께하면 참 다양한 주제를 상 위에 올렸다. 회사와 가정은 기본이요 정치와 종교 등 휘발성 강한 얘기도 사양하지 않고 서로 원하는 쪽으로 결론 내기 위해 격정적으로 말을 던졌다. 50대가 되니 조금 변했다.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럴 수 있지"라는 수동적 인정을 통해 상대가 말을 맺을 수 있게 하고 민감한 주제는 스스로 알아서 삼간다. 별것도 아닌 말이 자칫 내상을 입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좀 더 넉넉해진 요즘 거의 모든 만남에서 빠트리지 않는 이슈가 퇴직이다. 성큼 다가온 퇴직을 놓고 진중하게 마음을 나누다 보면 어느덧 저녁 자리는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힐링의 도가니가 되고 제2의 인생을 도울 정보 교환의 장터가 된다.


정년이 예순으로 늘었는데 벌써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한마디 거든다면 뭘 모르는 사람이다. 또래의 90% 이상은 사무직이다. 사무직에 정년은 의미가 없다. 지난해 5조원 가까운 손실을 낸 현대중공업은 올 초 구조조정 때 과장급 이상 사무직 1,100여명을 희망퇴직으로 내보냈다. 전체 사무직의 10분의1이다. 생산직은 건드리지 않았다. 둘을 가른 차이는 노조라는 조직의 여부다. 사무직은 아무리 둘러봐도 내세울 게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가라고 해도 항변은 꿈도 못 꾸고 고작 한다는 게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자기세뇌다. 대기업에 다니는 한 친구는 전직 프로그램을 권유받고 있다. 2년간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조건이다. "2년 뒤에는?"이라고 묻자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입으로 먼저 나가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을 거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계속 있게 해준다니?"라는 말은 미안해서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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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가 사회에 첫발을 디딜 때는 취직이 쉬웠다. 학교로 오는 입사 원서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제출하면 끝인 경우도 있었다. 별생각 없이 입사해 이제껏 잘 지내왔는데 옆구리로 불쑥 치고 들어온 퇴직이라는 녀석이 낯설기만 하다. '지금 다니는 회사가 아니라면 처음에 어디를 가야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봤다. 공무원·공기업, 무슨 무슨 협회 등 여러 후보가 거론됐지만 거의 모두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곳은 현대차 생산직이었다. 혹시 놀랐다면 과문 탓이다. 현대차 생산직이 얼마나 멋진 직장인지 알고 싶다면 서울경제 홈페이지(www.sed.co.kr)를 검색해보면 된다. 2011년 6월 기자가 데스킹을 봐 넘긴 '현대차 생산직 경쟁률 100대1, 얼마나 좋기에'라는 제목의 기사는 생산직 신입사원의 임금과 복지 수준을 '연봉 4,000만원, 대학생 자녀 3명까지 전액 등록금 지원, 무주택 직원에게는 사택 제공, 사실상 정년 보장'으로 요약한다. '한 번 입사하면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이상 대부분 정년까지 갈 수 있다'는 대목이 특히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다. 자식에게 자기 일자리를 물려주는 음서제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면 치밀어 오르는 감동을 주체하기 힘들 것이다.

추석 직전에 모처럼 하루 쉰 평일 집 주변은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청마의 시처럼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피트니스센터·식당·카페에서 숱한 아줌마들이 제각기 족한 얼굴로 하하 호호하며 지내는 것을 보며 '또래가 회사에 가서 전쟁 같은 하루를 살아내니 집에 있는 처자식이 마음 놓고 평화를 만끽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가까이 있는 골프연습장은 주말이면 30분 이상 기다려야 차례가 왔다. 평일은 텅 비었을 줄 알았는데 기다리지만 않을 뿐 다 찼다. 우리 동네에는 사업가가 참 많기도 하지. 나이 들어 창업하면 다 망한다고 하던데 망해도 3년은 가는가 보다.

둘러보면 세상 모든 사람이 사무직보다는 편하게 인생 사는 것 같다. 사무직이 그래도 백수보다는 낫다고 자위해보지만 그래 봤자 종이 한 장 차이 아닐까.

한기석 논설위원 hanks@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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