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9월14일] 훔볼트 권홍우 편집위원 27살의 고위직 귀족 청년. 막대한 유산까지 물려받은 그는 쏟아지는 혼담을 마다한 채 보따리를 꾸렸다. 소망했던 탐사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다. 근대 지리ㆍ지질학이 여기서 나왔다. 주인공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1769년 9월14일 프로이센의 군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4개 대학을 옮겨 다닌 끝에 광산학교를 나왔다. 고급공무원을 원했던 집안의 희망과 적성이 맞지 않았던 탓이지만 덕분에 화학과 지리, 지질ㆍ천문ㆍ생물ㆍ광물ㆍ해양학을 망라하는 박식가라는 명성을 얻는 토양을 쌓았다. 귀족에 대한 특혜로 어린 나이에 광산 감독관으로 지내던 중 모친이 사망하자 그는 탐사길에 올랐다. 유럽의 산맥과 지질을 연구하던 그는 1799년 스페인의 허가를 받아 6년간 당시 세계 최고봉에 오르는 등 중남미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산과 나무가 물을 저장하는 기능을 가졌다는 사실과 고도에 따른 동식물 분포 차이가 이 여행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페루 해역에 쌓인 새의 배설물인 구아노를 비료로 활용하자고 제안, 유럽 농업의 혁명적 생산 증대도 이끌었다. 귀환 후 20년간 집필한 30권짜리 '여행기'는 찰스 다윈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진화론으로 이어졌다. 책에는 파나마 지역의 운하건설 제안도 담았다. '천연기념물'이라는 용어도 여기서 최초로 쓰였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1859년 90세로 사망한 훔볼트는 독일에 자손 이상의 선물을 남겼다. 수백 개 나라로 분열돼 영원한 2류 민족으로 여겨지던 독일인들이 자연과학 연구의 주류를 형성하는 물꼬를 텄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의 모교이자 노벨상 수상자 29명을 배출한 훔볼트대학교를 세운 형 빌헬름(교육가ㆍ언어학자)와 더불어 근대 독일이 낳은 최고의 형제로도 기억되고 있다. 입력시간 : 2007/09/13 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