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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흘렀지만… 생생한 그날의 공포
가격정책 해법 못찾아 공급 늘려도 수요 감당 못할 판■ 9·15 블랙아웃 1년… 전력상황 나아졌나수천억 들여 기업 조업시간 조정 '외줄타기'공급 부족한데 정부선 요금 인상까지 억제가격 합리화·원전운영 논란 해결 등 과제로
김영필기자 susopa@sed.co.kr
전국 곳곳에서 정전 사태가 일어난 지난해 9월15일 밤. 서울 중심지인 중구 을지로 2가 일대의 주요 빌딩에 불이 꺼져 있다. /서울경제DB
지난해 9월15일 전국은 일순 암흑에 빠졌다. 전력부족으로 순환정전이 빚어진 탓이다.
충격이 컸던 만큼 후폭풍도 거셌다. 최중경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이 물러났고 주요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문책당했다. 정부는 재발 방지를 다짐했다.
1년이 흐른 지금 대규모 정전(블랙아웃) 가능성은 이제 사라진 것일까. 불행하게도 정전 사태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는 거의 없다. 전력 수급난을 촉발한 본질적 모순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가격문제다.
14일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올 들어 8월 말까지 정부가 기업에 조업시간 조정 등의 대가로 지불한 돈은 3,000억원에 달한다. 전력 수요가 정점을 찍는 피크시간대에 기업의 전력 소요가 몰려 대규모 정전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치른 비용이다.
물론 당장 수조원대의 돈을 들여 발전소를 짓는 것보다는 쌀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같은 조업시간조정은 순간 잘못 판단해도 실패할 수 있어 전력 당국은 매일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심정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지경부가 6월 내놓은 '전력수급 전망과 대책'을 보면 내년 동계까지도 '전력 보릿고개'를 겪어야 한다. 민원 등으로 발전소 건설이 지연돼 450만kW의 전기공급이 줄어든 게 주요 원인이다. 전력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중기 전력예측을 잘못한 탓에 국민이 불편을 겪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정부가 발전설비 확충에 한층 속도를 내 전력공급을 늘리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수요관리의 핵심인 가격정책을 쓰지 못하면 공급을 아무리 늘려도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기요금 원가회수율은 87.5%에 불과하다. 8월 전기요금을 평균 4.9% 올렸지만 한국전력은 올해도 수조원대의 적자를 면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전 입장에서는 공급도 수요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없어 수족이 묶인 것 같은 딜레마에 처했다. 이 때문에 한전은 요금인상 외에도 누진제 개편, 발전자회사의 비용부담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정부도 이 같은 사정을 감안해 지난해 한전의 구조적 모순을 풀고자 연료비연동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를 시행하지 않은 채 장부상 미수금으로 처리하고 있다. 땜질 식 처방이다.
물가안정을 위해 전기료 인상을 억제하려는 정부 방침도 탄력적 전력수급 조절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전력공급 가격 인상 문제를 정부가 계속 뒤로 미뤄 당장 민심은 우호적으로 돌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제2의 블랙아웃 위험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경기진작을 위해 전기료를 급격히 올리지는 못해도 최소한 가격합리화의 밑그림은 그려야 한다고 제언한다. 요금 정상화와 누진제 개편, 발전자회사의 부담 문제 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로드맵을 공개해 국민적 공감대를 사전에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다.
전력부족 현상이 계속되다 보니 원자력 발전소 운영을 둘러싼 논란도 커지고 있다. 운영한 지 35년이 된 고리 원자력 발전소 1호기와 원전 수명 연장 판정을 앞둔 월성 원전 1호기가 대표적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빠듯한 전기 사정에 원전 운영에 기댈 수밖에 없지만 환경ㆍ시민단체는 안전성 문제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