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운전자의 덕목

정기홍 <서울보증보험 사장>

오래전 해외사무소 근무차 런던에서 생활하게 된 적이 있었다. 기동력을 갖추기 위해 자동차를 구하자마자 운전면허시험을 보게 됐다. 운전이라면 한국에서 이미 다년간 경험을 쌓았으니 자신 있었다. 시험관을 옆에 태운 채 지시하는 대로 동네코스를 한바퀴 돌았다. 교통신호도 잘 지켰고 급정차나 급가속도 없었으니 당연히 합격이려니 생각했는데 결과는 낙방이었다. 다소 의아해서 불합격 사유를 물었더니 시험관 왈, “당신은 운전기술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나 주변을 살피는 조심성(careless)이 부족합니다.” 3개월 후 다시 응시했을 때 나는 1차 실패 사유를 상기하면서 일부러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모습을 시험관에게 보이려고 꽤나 애를 썼다. 그러나 2차도 낙방이었다. 운전하는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보일 뿐 아니라 너무 주저주저한다(hesitant)는 것이 불합격 사유였다. 순간 외국인이라고 차별하는 게 아닌가 싶어 화가 치밀었지만 대들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운전면허 하나 따기 위해 3수까지 해야 한다니 기가 찼지만 다음 기회까지 놓치면 임시면허기간이 만료돼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된다. 다급해져서 운전교습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늦가을이 돼서야 세번째 주행시험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 때문에 다소 긴장됐던지 신호 앞 정지선도 정확히 지키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로 합격이었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시험관이 던져준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기술이 얼마나 좋으냐를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운전자와 보행자를 배려하는 현지 관습에 얼마나 익숙해졌는가를 판단기준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사고도 줄이고 기분 좋은 교통환경이 유지되기 때문이란다. 차선 두개가 하나로 좁아지는 곳에서는 양쪽 차들이 한대씩 교대로 진입하기로 한다든지, 양보해줄 때는 꼭 손을 들어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 등이 그들의 습관이다. 운전을 하면서 다른 운전자들과 대화를 즐기는 것이다. 미리 정해놓은 교통 약속들이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하기 때문에 먼저 가려고 서두르는 일도 없고 여유롭고 편안한 운전을 할 수 있다. 복잡한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데드존’에 진입해 다른 방향에서 진행하는 차의 흐름까지도 막고 서 있는 이기적인 운전자들을 보면서 우리도 남을 배려하는 운전습관이 빨리 정착됐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외롭지만 우선 나만이라도 교통 약속을 실천해보자. 다른 사람들도 금세 그 길이 더욱 빠르고 편한 길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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