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마거릿 대처, "대안은 없다"… 시장친화 개혁 밀어붙여 영국병 치유

■ '철의 여인' 대처 전 영국 총리 타계<br>복지 축소ㆍ공기업 민영화 등 작은정부 정책 드라이브로 80년대 경제부흥 이끌어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이후 반세기 동안 미국과 영국 경제에서 지속됐던 '큰 정부', 즉 케인스주의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다.

대처가 취임하기 전 영국은 과도한 복지로 인한 경제 문제가 심각하게 부각됐다. 정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는 복지정책으로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영국병'이 유행처럼 번졌으며 이 여파로 영국 경제는 실질성장률 마이너스, 실업률 최대 6%, 인플레이션 15%라는 부진한 기록을 보였다. 새로 기업을 창업하려는 사람도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높은 세금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걸핏하면 벌어지는 노동조합의 파업으로 사회 전반에 무기력이 만연한 상태였다.


이에 대처는 감세 정책 등 시장친화적인 정책과 법질서의 회복을 내세우며 1979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그는 "정부는 통화 안정에 힘쓰고 세금과 정부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선거 유세를 이끌었다. 대처는 "법인세와 준조세를 줄이고 각종 규제를 철폐해 기업이 활동하기에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민영화를 확대해야 하고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노동 유연성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대안은 없습니다"=그는 취임 이듬해인 1980년 6월25일의 인터뷰에서 현재까지도 자주 인용되는 "대안은 없습니다(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잘라 말했다. 자유시장과 자유경제를 옹호한 발언으로 이는 이후 'TINA'라고 약식 표기되며 신자유주의만이 진리라는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실제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한 작업을 속속 실현시켰다. 취임 첫해에 외국환 관리 철폐와 국영사업 민영화에 착수하는 한편 노조 활동을 규제하는 입법에 나섰다. 1981년에는 공정금리를 폐지해 정부 주도의 금리통제를 중지하고 시장기능에 맡긴다는 정책을 취했다. 이 밖에 정부의 주택구입 보조비를 폐지하며 고등교육 지원금을 폐지하는 등 교육 투자 예산 대폭 감축 등을 추진했다.

◇취임 초 거센 반발 직면=대처의 이 같은 일방통행은 취임 초에는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그의 정책이 곧장 경제에 반영되지 않은 탓이다. 그의 취임 이듬해인 1980년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2%를 기록하며 전해의 2.8%에서 수직 낙하했다. 실업률 또한 1982년에는 300만명을 돌파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으며 무주택자 비율 또한 증가했다.


이에 1981년 여름 런던과 리버풀의 빈민가를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났다. 1984년에는 전국적인 탄광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처가 174개의 국영 탄광 중 20곳을 폐업하고 2만명의 탄광 노동자를 해고하겠다고 발표한 데 따른 반발이자 친기업 반노조의 대처 정권에 대한 노동계의 힘겨루기 성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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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서지 않는 대처=하지만 대처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반발과 비판이 커졌음에도 강경 진압했으며 노조 내부 분열을 유도하고 미리 확보해둔 석탄 재고를 풀어 국민 감정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마침내 1985년 3월 탄광노조가 파업을 풀자 대처는 "국가복지제도의 전면 재검토"를 선언하며 자신의 경제정책 드라이브를 강화했다. 1988년에는 40억파운드의 대규모 감세와 함께 고용법을 개정해 기존의 '클로즈드숍(closed shopㆍ노조 가입자만 고용이 가능한 제도)'을 철폐하고 사측의 입장을 따르는 개인 노동자나 제2노조도 취업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노조 천국"이라던 영국 노조에 치명타를 날렸다.

이 같은 대처의 정책은 점점 경제성장률 고공행진으로 입증이 되기 시작했다. 1980년 -2%에 머물던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이후 1982년 2.2%로 반등에 성공했고 이후 점증해 1988년에는 5.6%를 기록했다.

◇1980년대 말, 경제 삐걱=1979년 총선과 1983년ㆍ1987년 총선에서 잇달아 승리하는 기염을 토한 대처는 1980년대 말이 되어 경제지표가 일제히 나빠지면서 장기집권에 타격을 입게 된다.

경제성장률이 1988년 정점을 찍은 후 후퇴해 1990년에는 0.8%로 곤두박질쳤으며 물가상승률도 1990년 10%에 육박했다. 임기 내내 비교적 높았던 실업률과 주택보급률도 재조명되며 대처의 발목을 잡았다.

경제가 악화되자 대처는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머릿수에 동일한 세금을 매기는 인두세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는 감세를 핵심으로 삼던 대처 정책의 전부를 뒤엎는 것으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외에도 당시 유럽공동체를 추진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대처는 반대 입장을 표명해 유럽 각국 지도자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는 당시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하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으로 보아 이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이에 1990년 보수당 당수 선거 1차 투표에서 과반수가 넘는 득표를 했으나 규정상 65%가 넘어야 2차 투표 없이 당수가 된다는 규정 아래 2차 선거에 넘어가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후계자격인 존 메이저를 밀기로 결정하고 당수 선거에 사임했다. 이로써 영국 역사는 물론 글로벌 경제에 신자유주의 바람을 몰고온 대처리즘의 10여년이 막을 내리게 됐다.

◇21세기의 영국, 다시 대처에 주목=현재 영국에서는 대처 전 총리의 시장친화적인 경제정책을 표방한 제2의 대처리즘이 추진되고 있기도 하다. 조지 오즈번 영국 재무장관은 지난달 발표한 2013~2014 회계연도 예산계획에서 재정지출 긴축을 밀어붙이는 한편 부동산 시장 활성화를 위해 주택소유를 강조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트리플딥(삼중 경기침체) 우려가 높아지자 대처리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심산으로 그만큼 대처가 이룬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가 높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이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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