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9년 8월20일, 미국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 사람들이 항구로 몰려들었다. 흑인 20여명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미국에 흑인이 첫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다. 미국인들이 공식적인 선조로 여기는 메이플라워호 탑승자들의 폴리머스 도착(1620년)보다 1년4개월 빠르다. 흑인의 유입경로는 약탈. 네덜란드 선박으로 위장한 영국 사략선이 포르투갈의 흑인 노예를 빼앗은 후 제임스타운에 들러 보급품과 맞바꿨다. 교환 가격을 얼마로 계산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확실한 점은 흑인들의 신분. 노예가 아니라 계약제 하인이었다. 4년 계약의 하인을 고용하는 게 노예 유지 비용의 절반이라는 점에 착안한 농장주들은 흑인들과 계약을 맺고 백인 하인처럼 부렸다. 돈을 모아 백만㎡의 농장과 다른 흑인 노예를 보유한 흑인 농장주가 등장했다는 기록도 있다. 흑인들이 노예로 전락한 이유는 호황. 담배로 인한 북미 최초의 경제호황이 흑인의 노예화를 불렀다. 장기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다. 버지니아주 의회는 1662년 노예제도를 공식화하며 농장주들을 거들었다. 끝없이 늘어나는 담배경작지와 함께 흑인 노예도 급증해 독립전쟁 직전 흑인 인구는 남부의 3분의1에 이르렀다. 남부 출신 중에서도 제퍼슨 대통령처럼 노예를 개인적으로 해방시켜준 사람도 적지않았지만 흑인 노예는 19세 초ㆍ중반 더욱 늘어났다. 이번에는 면화 호황이 화를 불렀다. 손이 많이 가는 면화사업은 흑인의 노동력을 쥐어짰다. 담배와 면화를 매개로 한 돈에 대한 백인의 탐욕이 흑인노예제도를 낳고 심화시키는 과정에서 미국 경제가 성장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지위가 많이 향상됐다는 요즘도 흑인의 소득수준은 백인의 절반을 약간 웃도는 정도다. 미국 경제의 기저에는 이것이 깔려 있다. 흑인수탈 잔혹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