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을 10년째 앓고 있는 최모(58)씨는 요즘 혈압 체크를 평소보다 더욱 자주 한다. 얼마전 자신이 먹던 고혈압약을 위조한 가짜약 판매업자들이 적발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불안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난달 한미약품의 고혈압치료제 ‘아모디핀’을 위조한 가짜 약 120만정(40억원 상당)이 밀수입돼 유통 직전 적발된데 이어 이달 초에는 중국산 위조 항생제 400만정이 국내에 들어와 제3국으로 재수출하려던 사례가 세관에 적발되는 등 최근 가짜 약 유통사례가 점차 늘고 있다. 가짜 약은 효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각종 부작용으로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이에 따라 제약업계는 가짜 약 밀수ㆍ유통을 근절시키기 위해 도매업체와의 협조체계를 강화하고 포장 변경 등 위조방지 대책을 세우는 한편 관세청과의 핫라인 구축, 상호협력양해각서(MOU) 체결 등을 추진하고 있다. ◇관세청, 제약업체와 핫라인 구축= 관세청 조사총괄과 관계자는 10일 “국내외 의약품 밀수 동향 및 정보를 상시 교류하기 위해 제약업계와 연락망을 구축했다”며 “대한약사회ㆍ제약협회 등 유관기관과 상호협력양해각서(MOU) 체결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관세청은 지난 4일 서울세관에서 의약품 밀수입을 적극 차단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제약회사ㆍ제약협회ㆍ약사회와 함께 ‘위조 의약품ㆍ화장품 유통실태 및 단속방향’ 민관협의회를 개최했다. 관세청은 또 위조 약이 자주 반입되는 우범지역과 업체를 파악해 집중 단속하는 한편 해외 개설 사이트에 대해 외국 세관 등과 공조해 추적ㆍ처벌하고 국내 접속을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식품의약품안전청과 협조해 남대문시장 등 가짜 약 유통 가능성이 높은 ‘블랙마켓’에 대한 단속을 강화키로 했다. 그동안 가짜 발기부전치료제 등 특정 의약품 유통 단속을 위해 해당 업체와 관세청이 비공개적인 회의를 가진 적은 있으나 이처럼 의약품 밀수입 전반에 관해 공식적인 민관협의회가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약품 밀수입 사례가 크게 늘면서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발기부전치료제의 경우 관세청은 매년 60억원 상당의 위조품을 적발해 왔다. 가짜 고혈압약도 2003년 이후 꾸준히 적발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가짜 약으로 인한 치명적인 부작용 보고 사례가 없지만 지난달 미국에서는 원료성분 중 20%가 불순물 혹은 위조성분인 혈액응고제 ‘헤파린’을 투여받고 19명이 사망하는 등 가짜 약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전세계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협의회에 참석했던 제약협회 한 관계자는 “관세청이 모든 밀수현황을 파악하기 힘든 만큼 제약업체의 제보 등 협조를 당부했으며 필요시 관세청과 직접 연락해 신속한 수사가 이뤄지도록 협력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전했다. ◇제약사들도 대책 마련 부심=가짜 약 유통이 흔한 품목 중 하나가 발기부전치료제. 한국화이자는 위조방지를 위해 최근 자사 발기부전치료제 ‘비아그라’의 국내 유통제품 포장에 있는 회사 로고 홀로그램을 정면에서 볼 때는 파란색으로 보이지만 45도 비스듬히 눕히면 보라색으로의 변하도록 서둘러 변경했다. 화이자제약은 가짜 비아그라 유통 근절을 위한 전담부서인 글로벌 보안담당(Global Security)팀을 통해 한국의 세관에 신속한 첩보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 자사 고혈압약 ‘아모디핀’을 위조한 가짜 약이 적발돼 고초를 겪은 한미약품도 장기적으로 약의 용기 및 포장 변경 등을 고려하고 있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외부에서 조달하는 조제용 플라스틱 병이 약품마다 동일해 위조가 가능할 수 있어 별도 주문제작하거나 PTP 포장을 변경하는 방안 등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관의 눈을 피해 국내로 반입된 밀수 약의 유통을 차단하려면 의약품 도매업체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한미약품은 가짜 아모디핀 적발에 ‘일등공신’ 역할을 한 의약품 도매업체에 1,000만원의 격려금을 지급하는 등 도매업체와의 유대 강화에도 힘을 쏟고 있다. 한미약품은 과도한 약가마진을 보장해주겠다는 밀수업자를 수상하게 여긴 의약품 도매업체의 제보를 받고 경찰에 즉각 신고, 위조 약 밀수 일당을 조기에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도매업체에 터무니없이 높은 약가 마진을 보장해주거나 영수증 없는 무자료 거래를 요구할 경우 가짜 약인지 의심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밀수가 의심되는 가짜 약 신고는 국번없이 125번으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