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비합리적 성격은 자연스러운 성을 억압하는 데서 기인한다."
독일이 파시즘의 광기에 휘말리기 시작했던 1933년 처음 발간된 이후 70여년간 꾸준히 읽히며 파시즘 연구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가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저자 빌헬름 라이히는 정신분석학에서 출발해 1960-70년대 서구의 신좌파운동과 현대 정신의학에 큰 영향을 끼친 오스트리아 출신의 학자.
라이히는 파시즘이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닌 국제적 현상이며, 히틀러나 무솔리니 개인의 정신병리적 행동이 아니라,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의 표현이라는 점을 논증한다.
파시즘이 특정한 정치행위나 제도가 아니라 대중운동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
"나는 자신의 성격구조 속에 파시스트적 감정과 생각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성격분석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적 운동으로서 파시즘은 그것이 인민대중에 의해 탄생되고 대변됐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발적 파시즘의 원인은 무엇일까. 대중은 왜 스스로 비합리성을 욕망하는 것일까.
라이히는 히틀러에 대한 맹신으로 상징되는 당대의 '비합리성'을 대중들이 스스로 욕망하게 된 이유를 가장 먼저 지도자와 대중들의 성격구조가 서로 유사하다는점에서 찾고 있다.
대중들이 무지하거나 환상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라 지도자, 즉 히틀러의 성격구조와 동일한 성격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기꺼이 속은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런 동일한 성격구조의 특징은 좀 모호하긴 하지만 '권위에 대한 반항과 수용·복종이 동시에 얽혀있는 태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히틀러가 대중을 속였다기보다,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권위주의적이고 자유를 두려워하는 성격구조를 갖고 있었던 대중들이 히틀러를 승인했다고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을 얻는다.
한양대 임지현 교수의 '대중독재론'이 빌헬름 라이히로부터 지적 자양분을 제공받았다는 것은 이 대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실제 임 교수는 "내 개인의 지적 여정에서 이 삐딱한 마르크스주의자와의 만남은 '대중독재'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징검다리였다"고 쓰기도 했다.
또한 라이히는 히틀러와 대중들이 공유했던 성격구조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권위주의적 가족 이데올로기, 인종이론으로 대변되는 민족주의적 국가, 그리고 앞의양자에 공통되는 성의 억압경향에 주목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자연스러운 성에 대한 도덕적 억압이 일반적인 사고까지 억압하고 비판능력까지 무력화시킨다고 지적하는 대목이다.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의 목적은 고통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질서에 적응하고 그것을 참아내는 말 잘 듣는 노예 같은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라이히를 '자연스러운 성의 해방'이라는 결론으로 이끈다. 좀 더 넓게는 "생물학적 활동 욕구가 충족되고 발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동을 설계해, 성적 에너지를 노동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승화시킬수 있도록 하는" 노동민주주의(Arbeitsdemokratie)가 제시된다.
그린비 펴냄. 황선길 옮김. 552쪽. 2만3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