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 '시크릿 가든' 앞에 선 작가 문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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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이상 화가들은 현실의 재현(representation)에 매달려 왔다. 하지만 인상파의 등장과 함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이들은 대상에 대한 눈(目)의 인식을 넘어 이면을 파고들었다. "적어도 어떤 현대미술은 대상 세계에 대한 재현의 부재(不在)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라는 작가 문범(56ㆍ건국대 예술학부 교수)의 선언은 이 같은 동시대 미술가들의 역할을 얘기한다.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회화와 조각으로 나뉘는 장르 구분이 싫었다. 그래서 분류될 수 없는 작업(non-classified work)를 찾으려 애썼다. 그림 그리는 캔버스를 입체처럼 두껍게 제작해 상하좌우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는 조각 같은 회화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장르 타파에 매달리는 것 자체가 "또다른 편견의 굴레"라는 각성으로 1990년대 후반 회화로 돌아왔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연상시키는 몽환적인 문범의 작품은 그 같은 고뇌의 과정을 거쳐태어났다. 그의 신작을 만날 수 있는 4년만의 국내 개인전 '시크릿 가든'이 11월2일까지 통의동 갤러리 시몬에서 열린다.
작가는 붓 대신 손을, 물감 대신 오일스틱(크레용형태의 안료)를 사용한다. 손끝의 체온으로 녹인 안료는 춤 추듯 캔버스에 펼쳐진다. 꿈같이 아스라한 형태를 만들던 기존작과 달리 신작은 형태들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자유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여운을 끊어내고 과감히 형태를 독립적으로 살려낸 시도를 두고 작가는 "100m 달리기를 한 뒤 멈출 때 바로 그 자리에 멈추지 못하고 서서히 멈추게 되듯 전작에서의 형태들도 뿌옇게 흐려지면서 애매하게 사라졌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감각적이지만 작가의 의식이 깨어 있고, 그릴 소재를 정해놓고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우연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폭포나 절벽, 연기나 수풀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 모여 한 폭의 '비밀정원'을 만들었다. 작가는 "세상은 알 수 없는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 볼수록 알 수 없는 형태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시크릿 가든'이라 이름붙였다"고 설명했다.
단색조의 색감은 더욱 풍부해졌고 여인의 속치마 같은 화사한 작품도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 맞춰 작가의 대학시절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총망라한 도록도 출간됐다. (02)720-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