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명의자 공조하면 막을 수단 없어… '검은 돈' 은닉 창구로

■ 차명계좌 왜 성행하나<br>자금 실소유주 처벌할 규정 없어… 묵인한 금융사 직원 징계도 미미<br>조세포탈·비자금 조성 목적 넘어… 주가조작 등 다양한 범죄에 악용


차명계좌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마련한 돈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말 그대로 '불법 자금의 저수지'다. 한 검찰 관계자의 표현대로,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경영자나 부유층에게 차명계좌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의 대상이다. 지하경제를 만드는 주요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금융실명제라는 전대미문의 제도가 도입된 지 17년이 지났음에도, 왜 차명거래는 여전히 사회 전반에 독버섯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경제가 차명계좌를 전문으로 들여다본 검찰 관계자들과 금융당국, 금융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차명계좌가 등장하는 근원적인 원인은 차명거래에 대한 처벌 규정이 지나치게 느슨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됐다. 차명계좌 개설에 관여하거나 협조해준 명의대여자와 금융회사 직원에 대한 처벌이 유명무실하다는 것이다. 허술한 법망이 차명거래를 유혹하고 있는 셈이다. ◇명의자 공조시 막을 방법 없어=차명거래는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존재하지 않은 가공의 인물 명의로 계좌를 개설해 돈을 거래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친분관계가 있는 타인의 신분증을 제시해 계좌를 개설, 자신의 돈을 넣어두는 것이다. 두 유형의 차명거래는 계좌개설을 담당한 금융회사 직원 협조 없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계좌 개설을 위해서는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계좌 명의자와 자금 소유자가 상호 합의 아래 차명계좌를 개설하는 3번째 유형이다. '명의신탁'이라고 불리는 이 거래형태는 계좌 명의자가 직접 금융회사를 방문해 자신의 명의로 계좌를 만들어 실소유자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금융회사 직원으로서는 차명 여부를 알 도리가 없다. 보이스피싱 범죄에 자주 이용되는 '대포통장'도 마지막 유형에 해당한다. 대포통장이란 타인에게 양도 또는 대여된 통장을 일컫는 말로, 계좌 명의자에게 통장을 개설해주는 대신 일정한 사례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개설된다. 주로 보이스피싱 일당들이 돈이 필요한 노숙인을 꾀어 5~10만원씩 대가를 지급하고, 이들 명의로 통장을 만들어 범죄에 이용하는 사례가 많다. ◇차명계좌 왜 만드나= 그렇다면 차명거래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세포탈 ▦비자금 조성 ▦주가조작 사건에서 차명계좌가 자주 등장한다. 수백억원대의 재산을 보유한 자산가의 경우 차명계좌로 분산하면 중과세와 상속세를 회피할 수 있다. 특히 재벌은 상속세 납부 여부가 경영권 세습과 밀접하게 연관돼 차명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태광그룹이 차명계좌에 주식과 현금을 은닉한 이유 중 하나도 경영권 상속과 관련돼 있다. 비자금 조성도 차명거래를 하는 대표적 이유 중 하나다. 고위 정치인과 재벌이 서로 뒤를 봐주는 정경유착이 만연하던 한국사회에서 대부분 기업은 로비자금 조성을 위해 차명계좌를 이용했다.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모 그룹 회장이 대표적 사례다. 그는 수십개의 차명계좌에 비자금을 조성해 정치인들에게 돈을 뿌리고 경영권 상속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다. 정경유착이 상당부분 사라진 최근에는 주가조작 사건에서 차명계좌가 자주 사용된다. 주가조작은 주로 허위 매수주문과 통정거래 등의 수법으로 이뤄지는데 이를 위해 작전용 자금을 차명계좌에 넣어두고, 다른 사람과 주식을 사고 판 것처럼 위장한다. 제이유 그룹의 임원이 코스닥 업체 루보를 대상으로 1,000억대의 자금을 700여개를 동원해 주가를 조작한 '루보 사건'이 대표적이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단순한 기업인의 횡령·배임 사건이 정관계 로비 등 대형 비리사건으로 발전하는 경우 그 중심에는 대부분 차명계좌가 자리잡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허술한 법망이 차명거래 키워= 이처럼 차명거래가 곳곳에서 악용되고 있지만, 실상 금융회사 직원은 계좌 개설자와 자금의 실소유주가 일치하는지 조사할 권한조차 없다. 계좌 명의자가 실소유주의 요구로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더라도, 이를 막을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는 셈이다. 하지만 자금의 실소유주가 명의인의 동의 없이 차명계좌를 개설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 같은 형태의 차명계좌는 금융회사 임직원의 암묵적 협조 없이는 개설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행 금융실명법은 차명계좌 개설에 관여한 임직원에게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와 징계를 하는데 그치고 있다. 차명계좌 개설을 방조 내지 묵인할 유인이 충분하다는 얘기다. 자금의 실소유주에 대해서도 차명계좌를 개설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은 없다. 해당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고 어떤 용도로 썼느냐에 따라 횡령죄·배임죄 또는 뇌물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을 뿐이다. 명의를 빌려준 사람에 대한 처벌규정 역시 전무하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차명계좌로 활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명의를 빌려주는고의적인 행위나, 스스로 계좌를 개설해 타인에게 넘겨주는 등의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이 마련돼야만, 차명계좌를 통한 불법자금 거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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