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뮤지컬 '명성황후'가 한창 공연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창작뮤지컬로서 문화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그 공연을 보기 위해 대통령 내외까지 예술의전당을 찾은 어느 날, 공연 중 사고가 발생했다. 회전해야 할 무대 세트가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이다. 공연이 중단돼 필자가 급히 대통령 내외를 VIP룸으로 모셨다. 조금 있으니 명성황후 제작자였던 윤호진 에이콤인터내셔날 대표가 "문제가 해결됐다"고 알려왔다. 다시 대통령 내외와 객석으로 이동해 공연을 보려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공연이 시작되지 않았다.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필자는 다시 한 번 대통령 내외와 VIP룸으로 이동했다. 두 번의 대기실 이동 후에야 명성황후를 다시 관람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일화지만 당시 국가 원수를 모셔야 했던 공연에서 사고가 났기에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취임한 지 1년 정도 됐던 필자는 '이 직을 내려놓아야 하나'하는 공상까지 할 정도로 안절부절, 노심초사 상태로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필자와 윤 대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그 뮤지컬 '명성황후'가 개막 2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금요일에 관람한 명성황후는 20년의 역사를 고이 품은 채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공연이 끝난 후 리셉션장에는 이 작품을 20년 동안 이끌어온 윤 대표와 그가 세운 기획사 에이콤인터내셔날의 후원회 회원들이 자리해 20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아시아 뮤지컬 사상 첫 뉴욕 브로드웨이 진출(1997년), 영국 웨스트엔드 공연(2002년), 국내 창작뮤지컬 최초 유료 관객 100만명 돌파(2007년), 1,000회 공연(2009년)…. 이 같은 대기록의 뒤에는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작은 뮤지컬 기획사를 믿고 지지해준 그들(후원자)이 있었다.
명성황후와 같이 우리나라 역사를 소재로 하고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가 오랜 시간 기획한 뮤지컬 '아리랑'도 모습을 드러냈다. 일제 침략부터 해방기까지 한 민족의 끈질긴 생존과 투쟁 이민사를 다룬 조정래 작가의 동명의 대하소설을 모티브로 한 아리랑은 제작기간만 3년이라고 한다. 명성황후·아리랑, 그리고 올 하반기에 재공연 무대를 가질 '프랑켄슈타인'까지 대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한국 창작뮤지컬이 한 해에 세 작품이나 모습을 드러내니 이는 공연 제작자들의 뚝심이요, 도전이라 할 만하다. 한 작품을 만들기까지 넘었어야 했을 수많은 고비, 그리고 그 산을 넘어 세상에 나왔어도 이를 장기간 공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들의 도전과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뚝심 있는 이들의 도전이 한국 창작뮤지컬의 새로운 20년을 만들어나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