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CEO&Story]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

단색화 재조명으로 미술시장에 새바람

올 여름 베니스서 대규모 특별전 예정



英 아트페어 '프리즈' 등서 단색화로 외국 컬렉터 매료

전후세대 독창적 개성 알리며 韓 작가·작품 '롱런' 길 열어


'가장 존경받는 아트딜러'에 한국인으론 유일하게 선정


정부도 속수무책일 정도로 장기 침체에 빠져 있던 미술시장을 '그녀'가 살렸다. 지난해 문화계 주요 키워드 중 하나로까지 부상한 '단색화'로 국내 미술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온 인물. 국제갤러리의 이현숙(66·사진) 회장이다. 국내를 넘어 아시아 미술계에서도 으뜸 화랑으로 꼽히는 국제갤러리의 창업주인 그는 지난해 12월 세계적 권위의 미술매체인 '아트넷(Artnet)'이 선정한 '2014 가장 존경받는 아트딜러'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함께 명단에 오른 29명에는 래리 가고시안, 폴라 쿠퍼, 에마뉘엘 페로탱 등 세계적 화상(畵商)이 포함돼 있어 이 회장의 '대단한 명성'을 엿볼 수 있다. 앞서 이 회장은 아트넷 선정 '미술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미국 미술전문잡지 '아트앤옥션(Art+Auction)'이 선정한 '파워 딜러 100인' 등에도 한국인으로는 나 홀로 이름을 올렸다.

"국제 아트페어에 연 10회가량 꼬박꼬박 출품하면서 한국의 젊은 작가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다 보니 우리 갤러리가 제법 유명해졌는데 종종 '너희 나라에는 마스터(거장)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했습니다. 아차, 더 늦기 전에 한국의 마스터그룹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1960~1970년대 한국미술의 대표사조인 '단색화'를 주목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단색화의 미술사적 중요성과 달리 경매거래 가격을 보니 하종현의 대작이 1,000만원, 지금은 없어서 못 파는 정상화의 작품이 1,000만원도 안 되고… 겨우 이우환 작가 한 사람만 선전하고 있더라고요."

안전자산인 미술품에 대한 꾸준한 수요 증가로 글로벌 아트마켓이 최대의 호황기를 누리던 지난 2~3년간 한국의 미술시장은 금융위기 이후 장기 불황에 빠져 역행하고 있었고 회생의 기미도 없었다. 단기적으로는 시장회복의 동인이 필요했고 장기적으로는 한국미술의 대표 브랜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1982년 개관한 국제갤러리가 30주년을 넘어서며 향후 30년 그 이상의 큰 그림을 그리던 무렵 이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단색화가 승부수다."

뉴욕에서 티나킴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으며 세계미술계 동향에 밝은 큰딸 김태희 대표의 격려와 조언이 힘을 줬다. 미술사적 가치에 비해 시장평가가 낮은 편이었던 일본 미니멀아트가 뉴욕현대미술관(MoMA) 기획전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둔 사례를 통해 확신을 다졌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우선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대에 거래되는 단색화의 시장을 다시 짜야 했다. 작가 상당수는 타 화랑 전속인 경우가 많아 작품 확보를 위한 설득 과정도 고단했다. 마침내 2013년 5월 영국의 세계적 아트페어인 프리즈에서 전시를 열었다. 돌풍을 일으키며 작품은 완판됐다.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구매한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의 구겐하임과 디아아트센터, 영국의 테이트갤러리, 프랑스 퐁피두센터 등 유수 미술관의 이사회 멤버들이었다.

이 대목에서 이 회장이 단순한 '그림 장사치'가 아닌 '존경 받는 아트딜러'가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판매만 중시한다면 개인 컬렉터를 공략하는 게 수월하다. 그러나 미술관의 조망과 미술사적 평가가 우선돼야 작품도, 작가도 안정적으로 '롱런'할 수 있다. 미술관 이사회 멤버를 통해 작품이 미술관에 기증될 수도 있으며 추천을 받아 주요 기획전에 초청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후 이 회장은 아트바젤 등 국내보다는 해외시장을 주 타깃으로 단색화를 선보였다. 적극적이다 못해 공격적일 정도였다.

"작품 팔리는 걸 보고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놀란 동시에 '이러다 작품값이 들썩이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어 조용히 작품을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해외 아트페어를 다녀간 한국 컬렉터들의 입소문으로 서서히 국내에서도 단색화를 다시보기 시작했죠. 우리 전속화가인 이우환·박서보·하종현을 비롯해 정창섭·정상화·김기린 등 단색화 거장을 모아 대규모 기획전을 열었고 엄청난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후 지난해 10월 박서보 화백은 파리 페로탱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페로탱은 데미안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등 세계적 거장만을 소개해온 화랑이다. 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인 하종현 작가는 뉴욕 블럼앤포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뉴욕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서울옥션·K옥션 등의 주요 경매에 나온 단색화는 완판과 경합, 기록 경신이 이어졌고 낙찰가는 전년 대비 2~3배 이상 급등했다. 덕분에 미술시장 전반에 화색이 돌았다. 시샘 많은(?) 미술계에서 "훈장이라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공로가 컸다.

"좋은 일은 올해 더 많을 겁니다. 지난해 아트페어 10곳에서 성공한 뒤 전시요청이 e메일과 전화로 하루 2~3건씩 들어오고 있어요. 외국에 작품요청은 해봤어도 그쪽에서 작품 달라는 소리를 듣기는 화랑을 30년 넘도록 하며 거의 처음이었죠. 올여름에는 베니스비엔날레와 연계해 특별전 형식으로 대규모 단색화 전시를 엽니다. 이 전시가 성공하면 해외미술관 순회전 형식으로 선보이게 될 예정이고 그렇게만 되면 단색화는 세계 미술계에 제대로 기반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지난해 국제갤러리가 개최한 단색화전에 다녀간 지난 베니스비엔날레 총감독인 마시밀리아노 지오니와 이번 총감독인 오쿠이 엔위저 등이 전시를 호평하며 발 벗고 돕기도 했다. 이미 연 10회 이상의 아트페어 참가비용으로 30억원 이상을 썼고 이번 베니스 특별전에도 100만유로 이상의 비용이 드는 데도 이 회장은 이를 "장기적 투자"로 보기로 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국제갤러리의 2013년 작품판매 매출은 554억원. 비자금 사건에 거듭 연루되는 기형적 운영구조의 서미갤러리를 제외하면 단연 국내 최고다. 잘 나가는 데는 까닭이 있다. 이 회장은 이를 '신용'이라 말한다.


"거래는 신용이 생명입니다. 좋은 작가를 좋은 컬렉터에게 소개했기 때문에 작가도 성장하고 컬렉터도 보람 있죠. 작가의 전성기 작품, 그중에서도 수작들만을 골라 거래하도록 애썼습니다. 작품 구매자에게 좋은 작품을 제공하고 나중에는 환금도 될 수 있는지까지 따져야 하니까요."

관련기사



세계적인 안목을 자랑하는 그에게 주목할 만한 작품을 '찍어달라' 했더니 답은 역시 '단색화'였다.

"현재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으니 우리도 제대로 볼 필요가 있죠. 한국의 단색화와 서양미술의 미니멀리즘을 종종 비교하지만 우리 단색화는 개성이 분명합니다. 외국 컬렉터의 눈에는 일제 치하, 군사독재를 겪으며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던 전후 세대의 독창적인 표현방식이 아주 매혹적으로 보이나 봅니다. 그런 미술사적 가치가 있으니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는 게 당연하지만 국내에서 너무 과열되는 게 걱정이에요. 작품값이 갑자기 너무 오르면 외국 컬렉터가 구매를 꺼립니다. 단기수익을 노리고 금방 되파는 투기세력이 모이면 큰일이죠."

미술을 사치품이나 비자금 은닉처로 보는 부정적 시각을 떨쳐야 한다는 점과 함께 절대 미술품을 투기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그의 조언은 문화강국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라도 새겨둘 필요가 있다.

·사진=이호재기자

● 이현숙 회장은

△1949년 서울 △1969년 중앙대 가정교육학과 졸업 △1982년 국제화랑 개관 △2006년 한국화랑협회 회장 △2011년 세계 미술계 파워 100인 선정 △2013년 아트앤옥션 파워딜러 100인 선정 △2014년 아트넷 '가장 존경받는 아트딜러' '파워 여성 100인' 선정 △현재 국제갤러리 회장



거장만 엄선… 실험성 강한 전위적 작품으로 가치 높여

● 국제갤러리는

조상인 기자

공무원인 아버지와 서예를 즐기던 어머니를 따라 전시장을 찾아다니던 어린 이현숙은 미술을 전공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못해 포기하고 부유한 사업가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자녀 셋을 낳아 키우며 곱게만 살던 그가 돌연 서울 인사동에 '국제화랑'을 연 것은 1982년 초여름이었다. 철딱서니 없는 아낙이 그것도 남편 모르게 사업을 시작했다.

"결혼 후 남편과 미술에 대한 공통관심이 생겨 고미술과 도자기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사 둔 그림을 한 번씩 바꿔보고 싶은 마음에 화랑을 하면 그게 좀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 무모하게 뛰어들었죠."

동양화가 대세이던 1980년대에 그는 오지호·권옥연·윤형근·윤중식·장욱진·유영국 등 서양화를 전문으로 한 화랑으로 고유의 정체성을 잡았다. 색깔 분명한 기획전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러던 중 집안 사정으로 갑자기 남편과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게 됐는데 가족을 만나러 간 그곳에서 '눈을 떴다'. 도널드 저드, 알렉산더 칼더 같은 미니멀리즘 사조가 끝나가던 당시 우리나라는 이미 고루해진 인상파 아류에 젖어 있음을 깨달은 것.

그후 국제갤러리는 외국 미술의 첨단 동향을 국내에 선보이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뉴욕현대미술관 전시를 막 끝낸 헬렌 프랭컨탤러를 시작으로 프랭크 스텔라, 안소니 카로, 조나단 브로프스키, 안젤름 키퍼, 솔 르윗, 에드 루샤, 토니 스미스와 키키 스미스, 루이스 부르주아, 알렉산더 칼더, 요셉 보이스, 아니쉬 카푸어, 빌 비올라, 제니 홀저, 에바 헤세, 장 미셀 바스키아, 로니 혼, 칸디다 회퍼, 줄리안 오피, 장 미셀 오토니엘 등. 일일이 거명하기도 힘든 작가들을 그것도 세계 미술계에서 확실하게 인정받은 거장만 엄선해 들여왔다. 작가도 화상도 컬렉터도 '거물'급이었지만 이 회장은 주눅 들지 않았다. 거침없었다. 업계에서는 '배포 큰 사업가'라 하지만 정작 자신은 "구김살 없이 자라 세상물정을 몰랐던 탓"이라고 한다.

동시에 한국의 젊은 작가를 외국에 알리는 데 몰두했다. 그 결과 미술계 전문가들이 신뢰하는 '아트팩트넷'이 선정하는 작가 종합 순위에서 1만명 이내에 꼽힌 한국작가 상당수가 국제갤러리 전속 작가들이다. 이우환은 물론 영상작가 김수자, 설치미술가 양혜규를 비롯해 정연두·김홍석·함경아·이기봉·김기라·신미경 등이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독특한 점은 국제갤러리가 선보이는 작품들은 거래가 쉬운 '고운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실험성이 강한 전위적인 작품인데 미술시장에서는 고가에 거래되는 '경계의 예술'이 대부분이다. 한 자리에 안주하면 안 된다는 이 회장의 신념과 경험으로 익힌 감각과 안목이 발휘됐고 작품성을 추구하면 재화적 가치는 알아서 뒤따른다는 지론이 반영된 결과다. 국제갤러리는 올해 빌 비올라, 함경아, 하종현, 김홍주, 트레이시 에민 등의 전시를 예정하고 있다.




조상인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