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한강과 용산-양창훈 현대아이파크몰 대표


고대 삼국시대의 고구려와 백제·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이 싸움은 3세기 중반부터 시작돼 300년간 이어졌다. 한강 유역의 패권다툼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전투로 목숨을 잃은 삼국의 왕이 고구려 고국원왕과 백제의 개로왕, 성왕 등 세 명이나 된다. 삼국이 얼마나 한강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삼국 모두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시기가 국력이 가장 강대했던 전성기와 일치한다. 한강을 손에 넣었던 제왕들은 명군(名君)으로 역사에 이름을 떨쳤다. 백제 근초고왕은 중국 요서지방까지 진출했고 고구려 장수왕은 동북아의 패권을 차지했으며 신라 진흥왕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강은 넓은 평야를 이룬 곡창지대였으며 물자 수송과 중국과의 교류에도 유리했다. 한강은 한반도의 젖줄과도 마찬가지였다. 용산은 한강을 통해 들어오는 서울의 관문이다. 과거를 보는 선비들은 남태령과 장승배기를 지나 노량진을 거쳐 도성으로 들어왔다. 노량진 나루터는 경강(京江)의 4대 도선장 중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조선시대 정조는 이곳 노들나루에 배다리를 만들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찾았다. 여기에 바로 한강 최초의 근대적 다리인 인도교가 세워졌다. 이후 두 차례 이름이 바뀌어 '제1한강교'를 거쳐 지금의 '한강대교'가 됐다. 한강대교는 한강을 건너는 31개의 다리 중 유일하게 '한강'을 명칭으로 쓰고 있으니 맏형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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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요충지이기에 역사의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파견된 청나라 군대는 용산에 주둔했으며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도 이곳에 군영을 꾸렸다. 이후 일제는 용산에 철도기지를 세워 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바로 지금의 용산역이다. 해방 이후에는 공교롭게 미군이 주둔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런 용산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용산은 서울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변하는 지역이다. 자고 일어나면 곳곳의 스카이라인이 달라진다. 용산기지 이전으로 우리나라에도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도시공원이 생길 것이다. 용산역은 KTX와 ITX·경의중앙선·1호선이 지나고 공항철도와 신분당선 연결이 예정돼 있는 등 국토에 혈류를 보내는 심장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에 맞춰 한강변 개발도 본격화돼 이태원부터 한강공원 일대는 세계적인 관광벨트로 조성된다. 용산 지역의 강변북로는 지하로 내려가 사람들이 산책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한강대교 중간 노들섬에는 국악예술당이 들어서고 한강공원에는 프랑스 센강변 같은 도심 백사장이 조성된다.

용산(龍山)이라는 지명은 서기 97년 백제 기루왕 때 처음 기록으로 등장하는데 그해 한강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동안 용산은 서울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면서도 도심과 강남에 밀려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용이 다시 비상(飛上)할 채비를 하고 있다. 다시 한 번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 용이 승천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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