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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가 재무적 어려움에 빠진다면 장기적으로 어떤 방안이 필요할까요."
파트너십 체결을 위한 홍콩의 프레젠테이션 현장에서 고객사의 임원이 물었다. 젊은 청년은 어눌한 영어지만 또박또박한 어조로 "건실한 재무 구조를 바탕으로 지난 150년 간 수 많은 위기들을 극복해온 우리 은행의 리스크 관리 능력을 믿어달라"며 안심시켰다.
지난달 30일 케이블 채널 tvN의 '슈퍼챌린저코리아'의 한 장면이다. 스펙이 아닌 패기로 뭉친 20대 구직자 4명은 한 외국계 은행의 홍콩 현지 임원들로부터 '특별 과외'를 받은 뒤 PT에 투입됐다.
◇TV 오디션 프로서 직접 채용…멘토링 콘서트도 개최=기업이 젊은 인재를 찾아 나서는 방식이 진화하고 있다. 일회적인 채용 설명회에서 벗어나 회사 임원들이 장기간 구직자와 호흡하며 멘토링까지 책임지는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는 추세다.
가장 파격적인 방식을 도입한 곳은 세계 금융 허브 런던을 중심으로 70여 개국에 진출해 있는 스탠다드차타드은행.
이 회사는 글로벌 인재 양성을 표방하는 tvN의 프로그램 제작을 후원하며 기업 임원이 직접 심사위원이자 멘토로 참여해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이색적인 방식을 선보이고 있다.
'슈퍼스타K', '위대한 탄생'등 오디션 프로그램이 진작에 대세로 자리잡은 가운데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지난 10월 말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오는 14일까지 계속된다.
치열한 예선을 거쳐 선발돼 프로그램 본선에 진출한 16명은 매회 '창업 후 수익내기', '캠페인 기획' 등의 특정 미션을 부여 받는다.
프로그램은 이들의 활동이 심사위원의 평가를 거친 뒤 매주 탈락자가 발생하는 서바이벌 방식으로 진행된다.
시청자에게 자신의 얼굴을 알린 본선 진출자 16명 전원에게는 스탠다드차타드은행 국내 인턴십 자격이 주어지며 '톱 4'는 같은 회사에 정규직으로 입사한다. 최종 우승자 1명은 정규직 채용은 물론 해외 인턴십 기회와 3,000만원의 자기계발비도 챙겨 간다.
지난 주 방송에서 '톱 3'까지 살아남은 원광대 4학년생 안수빈(25)씨는 "원체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성격이라 명문대가 아니라도 실력만 보여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한 달 뒤 취업을 해도 안정적인 생활만 추구하는 뻔한 직장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톱 6'까지 오른 뒤 지난달 23일 탈락한 강원대생 전보라(23) 씨는 "스펙 이외에 나만의 경쟁력이나 스토리를 이력서에 표현할 방법이 없어 이 프로그램에 지원했다"며 "살짝 굽혔다가 발 돋움을 해야 더 높이 점프할 수 있는 것처럼 매 순간 이기려고만 하는 승부근성보다 중요한 것이 조직과의 화학적 융화라는 사실을 배웠다"고 전했다.
기획서부터 본선 진출자 선정 등 프로그램 전반을 총괄한 박종훈 전무는 "스펙만으로 평가 받는 것에 익숙해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던 참가자들이 결국 내 마음을 움직이고 성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보람을 느꼈다"며 "결국 인재는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탠다드차타드은행만큼 파격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삼성그룹과 LG그룹 등도 기존의 뻔한 모델을 탈피한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지난해부터 멘토링 토크콘서트 '열정 락(樂)서'를 진행하고 있다. 이것 역시 그룹의 사장단과 임원이 한 달 동안 구직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방식이다.
지난 10월23일부터 11월20일까지 7회 동안 진행된 '열정락서 시즌 3'에는 윤부근 삼성전자 사장, 김석 삼성증권 사장, 박기석 삼성엔지니어링 사장 등이 멘토로 참여해 본인의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고 인생에 닥칠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방법에 대해 조언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 시즌 4를 시작할 예정"이라며 "취업에 앞서 성공한 멘토를 직접 만날 수 있는 데다 참가비 또한 무료라 대학생들의 호응이 크다"고 소개했다.
LG그룹은 대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LG드림챌린저'라는 멘토링 캠프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에도 대학생 6명 당 1명의 LG그룹 임직원이 멘토로 참여하며 내년 1월 4회에 걸쳐 진행될 캠프에 총 200명의 학생이 참가 신청을 해놓은 상태다.
◇기업은 대외 이미지 올리고 구직자는 취업 경로 다양화=이런 프로그램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는 훌륭한 인재 찾기가 쉽지 않고 구직자 입장에서는 갈수록 심화되는 취업난과 스펙만으로 평가 받는 사회 환경이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취업포털 커리어의 박수정 컨설턴트는 "옥석을 직접 가린다는 의미와 함께 회사 고위 관계자가 젊은이의 취업에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은 기업의 이미지 상승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일각에서는 비판도 제기된다. 특히나 슈퍼챌린저코리아의 경우 어딜 가나'슈퍼 을(乙)'일수밖에 없는 구직자들에게 취업이라는 미끼를 던져 그들의 재능과 사연, 인생사를 상업적이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내년부터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대학생 정윤지(23)씨는 "탈락한 참가자들의 눈물 흘리는 얼굴과 살아남은 자의 환호를 연이어 붙이는 편집을 보며 마치 시혜를 베풀 듯 '괜찮아,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으니 인턴 정도는 시켜줄게'라고 말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