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0도를 밑돌던 12월 초의 어느 날. 서울 모처에는 흰머리가 성성한 은행원 10여명이 모였다. 참석자들의 절반 이상은 이미 현직에서 은퇴한 퇴직행원들. 이 모임의 중심에는 현재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종휘(64ㆍ사진) 전 우리은행장이 있었다. 지난 1994년 이 위원장이 한일은행에서 서울 용산구 동자동지점장을 맡을 당시 함께 근무했던 행원들이 18년 넘도록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20대 초반의 풋풋했던 여성 신입행원이 이제는 마흔을 훌쩍 넘은 고참급 행원이 됐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지만 1년에 한두 차례씩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이들 대화의 주제는 항상 20여년 전의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여년 전 부산지점에서 동자동지점으로 갓 올라온 당시 30대 초반의 박 대리는 이 위원장을 '호랑이 지점장'으로 기억한다. 행원들이 외부에 나가 영업을 하기보다 은행창구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일반화돼 있었던 시절, 이 위원장은 박 대리에게 매일 외부에 나가 영업을 하게 했다. 한술 더 떠 매일 영업일지를 작성하게 해 지점장까지 보고하도록 했다. 서울 지리도 몰랐던 박 대리가 하루 빨리 서울 금융시장의 분위기를 익히라는 의도였지만 지점장의 속뜻을 모르는 박 대리는 매일매일 호랑이 지점장을 원망했다고 한다. 그러던 박 대리는 지금도 이 위원장을 만나면 그의 손을 꼭 잡으며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당시 정석대로 은행영업을 배워놓았던 것이 나중에 박 대리가 지점장과 지역본부장을 맡을 때까지 두고두고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후배들에게 무언가 한가지씩은 남겨준 게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큰 보람을 느끼지요." 이 위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이 위원장은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하기 전이었던 1970년 일반행원으로 한일은행에 들어왔다. 이후 40여년 만에 행장 자리까지 오르며 현재도 우리은행의 행원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선배 행원 중 한 사람으로 회자된다. 그만큼 입지전적 인물이지만 이 위원장은 '성공비결'이 뭐냐는 질문이 가장 당황스럽다고 한다. 스스로를 특출한 재능을 지닌 '비범인'이라기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금융인으로서 지나온 삶을 야구경기에 비유하자면 1대0으로 이기는 게임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당연히 7대6으로 이기는 게임이 더 재미있겠지만, 1대0으로 이기는 게임은 실점 없이 안정적으로 승리를 이끈 게임과 같잖아요. 지난 40여년 동안 금융인으로서의 철학은 그저 꼼수 없이 정도를 걸어왔던 것뿐이지요. 그게 나름의 성공비결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마디로 개개인의 화려한 플레이보다 실점을 최소화하며 팀 전체가 함께 빛을 볼 수 있는 게임을 우선시했다는 것이다.
실제 은행 업종의 특성상 실적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이 위원장은 은행에 40년 넘게 근무하면서도 남들이 한두번쯤은 받아봤을 실적상을 단 한차례도 수상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위원장은 "약간의 편법을 쓰면 당장은 남들보다 앞질러 가는 것처럼 보여도 금융업의 특성상 아주 작은 실수도 고객에게 피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며 "영업을 뛸 때 몸은 민첩하게 움직이되 가슴속에는 고객 입장에서 여러 번 생각하며 서두르지 않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고 자신의 영업철학을 밝혔다.
이처럼 '기본기와 원칙'을 강조하는 이 위원장의 철학은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신념이기도 하다. 2008년 6월 이 위원장이 당시 우리은행장에 취임했을 때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시중은행들을 중심으로 펀드 유치 과열경쟁이 만연돼 있었는데 이 위원장은 역으로 무리하게 실적을 확대하기보다 불완전판매를 최소화하라고 강조했다.
일부 무리수를 두고 실적을 늘려오거나 불완전판매가 적발된 영업본부나 지점은 가차없이 철퇴를 맞았다.
"편법이나 꼼수를 쓰면 조직의 어느 한 곳에서부터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지요. 모든 조직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최상의 시너지를 창출하려면 무조건 정도(正道)밖에 길이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일부 임원과 주주들에게 원성을 듣기도 했지만 '욕을 먹어도 괜찮다'는 생각에 원칙대로 밀어붙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후회가 전혀 없어요."
실제로 이 덕분에 우리은행은 2008년 말부터 불거진 환헤지통화옵션상품인 키코(KIKO) 사태도 큰 물의 없이 극복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은행의 키코 판매 중소기업 숫자와 손실액 수준은 여타 시중은행의 10분의1에 불과했다. 이처럼 이 위원장의 '정도경영'은 위기에서 더 빛이 났다.
기본기를 강조하는 그의 철학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지난해 4월 신용회복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 위원장은 신복위 창립 이후 처음으로 최근 저성과자 직원 6명에게 재택근무 조치를 내렸다. 갑작스러운 재택근무제도 도입에 일부 조직원들이 술렁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약 3개월간 일선현장을 벗어나 개개인이 본인의 업무에서 필요한 기술이나 감각을 연마할 여유를 주자는 것이 이 위원장의 취지였다.
"올해 처음으로 재택근무제도를 실시하다 보니 해당 직원들이 조금 당황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직에 오랜 시간 몸담고 있다 보면 목적의식 없이 방황하는 위기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인데 이때 조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재충전의 시간을 주자는 의도지요."
저성과자들에게 인사상 불이익보다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주자는 이 위원장의 생각은 그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이 위원장은 60년이 넘은 인생여정 중 가장 큰 위기의 순간으로 2007년을 떠올린다. 수석부행장까지 지내며 은행 내부에서 승승장구하던 시절, 이 위원장은 행장 발탁에 한차례 고배를 마시며 갑작스럽게 40년 가까이 몸담았던 은행을 떠나 이른바 '백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은행을 나가자 처음에는 흔히들 말하는 '멘붕'이 찾아왔지요. 그동안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려왔으니 갑자기 지향점이 사라진 거잖아요. 그렇게 1년간 방황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에든 도전해보자'라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2007년 은행을 떠날 때 또다시 은행으로 돌아올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는 2008년 우연한 기회에 또다시 행장 공모에 지원, '금의환향'에 성공했다. 그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며 "도전이 성공하든 실패에 그치든 일단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40년 동안 한눈 팔지 않고 묵묵히 금융인으로서 외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이 위원장.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에너자이저'처럼 지치지 않는 열정의 원동력이 궁금했다.
"지치거나 스스로 나태해졌다고 느낄 때마다 이른 새벽 재래시장을 찾아갑니다. 추위에 곱은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면서도 입가에는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는 상인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땀방울의 가치를 느끼지요."
이 위원장은 금융계 원로로서 현재 국내 금융산업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최근 사회 전반에 화두로 떠오른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는 다부지게 소신을 밝혔다.
"경제민주화와 금융소외 계층 보호에 대한 논의는 국내 금융산업이 반드시 풀어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하지만 은행권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면 이는 곧 부실로 이어지고 국내 금융산업의 퇴보를 초래할 수도 있어요. 금융계에는 대신 주주 중심의 경영 마인드에서 벗어나 종업원과 투자자ㆍ고객 전체의 이익을 고루 배려하는 패러다임의 변호가 필요합니다. 여기에 더불어 수익의 일부분을 금융소외 계층에게 돌려주는 것도 은행의 책무예요."
본인은 이제 은퇴 이후 제2의 인생을 위한 고민이 한창이라고 말하는 이 위원장. 하지만 한국 금융산업의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하는 그의 열정과 애정 속에는 여전히 40년 금융인 인생을 관통해온 뜨거운 금융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 위상 커가는 신용회복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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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휘 위원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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