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축중증(大縮中增)」은행들이 대기업 여신은 가급적 줄이는 대신 신용도가 높은 기업을 집중적으로 골라 찾는 「탈(脫) 대기업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을 계기로 나타나기 시작한 이런 은행권의 여신전략은 이제 전 은행들의 공통된 화두로 굳어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금융 전문가들도 지금의 은행권 여신전략이 긍정적으로 파급될 경우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전후의 신용경색기에 나타났던 자금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환영하고 있다.
◇대기업이라고 무한정 주는 시대는 지났다=신용경색시대에 은행들은 말 그대로 5대 그룹 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했다. 당연히 돈은 5대 재벌의 손아귀에서만 맴돌았다. 제법 우량기업으로 평가받던 64대 그룹들도 돈구경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이 일단락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은행권에는 더이상 「우상적 존재로의 5대 그룹」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출세일」이란 개념도 5대 그룹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감독당국의 규제강화도 탈대기업화를 가속시키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5대 그룹에 대한 편중여신을 해소하라는 것이다. 동일인여신한도 등 여신규제도 대폭 강화했다. 이에 따라 외환은행이 최근 「TELIT제(거래처별 총신용공여 한도제)」를 도입하는 등 은행권도 발빠르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은 물론 거래기업에 대한 종합적인 여신한도를 책정, 한도를 넘는 기업의 여신은 가급적 축소·회수하겠다는 전략이다. 은행측은 대신 회수되는 여신은 우량중소기업으로 돌린다는 심산이다.
주택은행도 마찬가지. 김정태(金正泰) 행장은 최근 『30대 기업, 넓게는 64대 기업에도 신규대출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명분은 『예전의 전문 주택금융기관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지만 「편중여신 해소」라는 근시적인 목적이 숨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덕분에 은행들의 「여신분포도」 또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은행별로 5대 그룹에 대한 전체여신이 최대 70%까지 줄어든 반면 중소기업과 가계대출은 급증하는 추세다. 은행의 여유자금이 대부분 이곳으로 흘러갔다는 얘기다.
◇우리도 은행돈은 필요없다=5대 그룹도 더이상 은행돈에 의존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부채비율을 축소하라고 야단인 마당에 신규대출을 받는 것은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증권시장 활황에 힘입어 대기업들은 은행문을 두드리는 대신 증자 또는 회사채발행을 통해 자금을 쉽게 조달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중 기업들의 유상증자 물량만도 30조원에 달하는 실정이다. 조달방법이 「간접」에서 「직접」으로 바뀐 셈이다. 쉬운 방법을 두고 까다로운 은행원들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가급적이면 빨리 상환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른바 「탈은행화」 노력이다.
◇체계적인 신용분석기법 마련이 관건=중소기업에 대한 여신증대는 과거와 같은 「할당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담보 위주가 아니라 기업의 사업성을 평가해 이루어지는 여신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여신전략이 바뀐 만큼 은행원들이 더욱 고달픈 것도 사실이다. 은행 여신담당자 중 상당수는 아직도 5대 그룹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다. 수십개의 중소기업을 찾아 대출해줘도 5대 그룹 하나에 대출한 것만 못하다. 위험도도 그만큼 높다.
하지만 신용분석기법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은행들이 그룹 또는 기업별 여신한도를 책정하고 있지만 아직은 「함량미달」이다. 발로 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올해 안에 신용분석기법이 정착되지 않으면 내년께 또다시 「5대 그룹 몰아주기」 현상이 재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김영기 기자 YGKIM@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