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마리오가 돌아왔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디플레이션 위기에 직면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을 구하기 위해 강력한 양적완화(QE)로 승부수를 던졌다.
22일(현지시간) ECB 통화정책회의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드라기 총재는 "공격적인 채권 매입을 통해 물가상승률을 중장기적으로 2%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날 드라기 총재가 밝힌 QE 조치는 매달 600억유로어치의 자산을 오는 3월부터 내년 9월까지 총 19개월간 매입하는 것이다. 주 매입대상은 유로존 회원국들의 국채이며 지난해 말부터 사들이고 있는 커버드본드와 자산담보부증권(ABS)도 포함된다.
이 같은 QE 규모는 시장의 예상규모를 웃도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당초 약 5,000억유로의 채권 매입 프로그램을 예상해왔다. 이후 회의를 하루 앞두고 매월 500억유로 규모의 QE를 최소 1년 이상 실시할 것이라는 관측이 급속도로 확산됐으나 드라기 총재가 발표한 내용은 이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다만 그리스 등 취약국 국채 매입에 대해서는 단서조항을 달았다. 이는 손실 분담을 우려한 독일 등의 주장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시장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다. 이날 기자회견을 지켜본 전문가들은 지난 2012년 유로존을 위기에서 구한 '슈퍼 마리오' 드라기 총재를 떠올렸다. 그는 당시 재정위기가 한창이던 유럽 경제를 "무슨 수를 쓰더라도(Whatever it takes) 구하겠다"며 위기를 잠재웠다.
기자회견 이후 유로권 증시는 모두 강세로 돌아섰다. 유로스톡스지수는 전일 대비 0.74%, FTSE 100지수는 0.45%가 올랐다. 국채 가격도 일제히 강세를 보여 독일 10년물 국채금리는 전날보다 0.06%포인트 하락한 0.462%로 떨어졌다. 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국채금리도 일제히 하락했으며 그리스 국채금리도 0.15%포인트 떨어졌다.
드라기 총재가 시장의 예상을 넘는 전면적 채권 매입이라는 초강수를 두게 된 것은 2010년 그리스부터 시작된 유로존 경제위기의 불길을 잡기 위해 ECB가 지난 5년간 내놓았던 각종 부양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ECB는 초저리 장기대출프로그램(T-LTRO), 마이너스 중앙은행 예치금 금리, 커버드본드 매입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유로존 물가는 지난해 말 급기야 전년 대비 마이너스 (-0.2%)로 떨어지고 3·4분기 경제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2%로 낮아지며 디플레이션 공포에 휩싸였다.
드라기 총재는 지난해부터 ECB의 자산규모를 2012년 수준으로 되돌리겠다며 자산매입 시그널을 줘왔다. 지난해 말 ECB의 대차대조표상 자산은 약 2조1,502억 유로로 2012년 말 3조유로에 비하면 거의 1조유로가량 쪼그라든 상태다.
경기 둔화 와중에도 ECB 자산이 오히려 줄어든 이유는 2011년과 2012년 장기대출프로그램(LTRO)을 통해 유럽 은행들에 뿌렸던 유동성을 은행들이 서둘러 갚았기 때문이다. 실물 경제 부진으로 지속되자 은행들이 기업과 가계 대출을 꺼렸다는 얘기다.
ECB는 이번 QE 조치를 통해 은행과 기관투자가들이 들고 있는 국채를 사들이면 그 현금이 실물경제로 흘러들어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대규모로 돈이 풀어 유로화 가치가 더욱 떨어지면 유럽 수출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고 수입물가 상승을 통한 인플레이션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 ECB의 노림수다.
그러나 ECB가 대규모 QE를 통해 경제 회복에 성공한 미국의 선례를 따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의구심이 제기된다. 유럽이 미국식 QE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진작부터 제기됐지만 ECB 최대 출자국인 독일에 반대에 가로막힌 드라기 총재는 지금까지 '립서비스'로만 시장을 달래오다가 결국 디플레이션 공포가 커지자 뒤늦게 결단을 내렸다. 시장은 이미 ECB의 행보를 읽고 국채 금리와 환율에 이를 선반영했기 때문에 추가 금리 하락 여지도 크지 않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최대 무기는 '충격' 요법을 통한 시장 조정"이라면서 "이번 QE는 '충격과 공포' 요소가 부족하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