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와 플러스가 만나면 밀어내고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만나면 당기는 물리학의 이론을 연극 무대에도 그대로 가져올 수 있죠. 무대 위 배우들이 서로 주고받는 정서의 흐름, 관객과 배우가 밀고 당길 때의 느낌이 제법 닮은 구석이 있지 않나요?"
물리학과 연극(무대 공연). 언뜻 봐도 하나로 통하는 특징을 찾기 어려운 이질적인 두 분야다. 이들의 공통분모를 놓고 박인배 세종문화회관 사장(60ㆍ사진)의 설명은 그럴 듯했다. 스물한살의 물리학도였던 그는 우연히 학내 연극반이 한 장면을 놓고 머리를 맞대며 이리저리 조율하고 반복해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남다른 이끌림을 느꼈다. 그 길로 연극반에 몸을 담았다. 김지하ㆍ임진택 등 쟁쟁한 선배들과 호흡하며 설레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1980년 '서울의 봄' 시절 진보적 연극운동을 펼쳤던 그는 세 차례 구속되고 2년여간 감옥 신세를 져야 했다. 이후 그는 서울대 연극반 출신이 주축이 된 대학로 극단 연우무대로 발을 옮긴다. 하지만 이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1984년 연우무대가 올린 연극 '나의 살던 고향은(연출 임진택)'이 '반국가적'이라는 지적이 일면서 운동권 출신 연극인들이 쫓겨났다. 박 사장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곧장 공장 밀집지역인 서울 구로동으로 갔다. '전통문화연구소 살림마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노동자들을 상대로 풍물ㆍ소리ㆍ탈춤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살림마당'을 근간으로 1988년 극단 현장을 창단했다. 이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등 삶의 궤적을 옮겨가며 민중문화 운동가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런 그가 지난해 1월부터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공공 예술기관을 이끌게 됐다. 박 사장의 인사를 놓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코드 인사'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렸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구상을 풀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취임 1년 3개월. 12일 서울 세종로 집무실에서 박 사장을 만나 그간 실행에 옮겨온 각종 프로젝트의 성과와 복안에 대해 들어봤다.
젊은 날 '민중'을 중시했던 그의 무게중심은 공공 예술기관의 수장이 돼도 변함없었다. '세종문화회관의 문턱을 낮춰 관객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겠다'는 것은 그가 최우선으로 두는 가치다. 박 사장은 '예술경영'이라는 말을 빌려 설명을 이어나갔다.
"공공기관의 경우 어떻게 하면 더 시민들과 문화예술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남다른 경영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공 공연장이 수익성만을 목표로 한다면 민간에 매각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면 공공기관으로서 시민과 끊임없이 호흡하며 문화예술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역할을 충분히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그가 강조하는 예술경영의 틀은 크게 '자치구 연계공연 활성화'와 '시민참여 프로그램 확대'로 귀결된다. 자치구 연계공연 활성화는 세종문화회관이 단순히 '서울 광화문에 있는 공연장 하나'라고 여겨지기보다 '서울 시내 모든 공연장과 긴밀한 네트워크가 이뤄지는 거점'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시도다. 박 사장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든 공연을 시민생활권으로 가져가며 '연계공연' 시대를 열었다. 수준 높은 공연과 예술가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종문화회관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연계공연 확대 과정에서 세종문화회관 산하기관의 공연제작비 감소가 빚어졌다는 이유로 예술감독 2명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사표를 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박 사장의 '지역 연계공연 확대'에 대한 신념은 흔들림이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공공 문화시설은 지방정부로부터 자금을 받아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수부족 등으로 지방자치단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가장 먼저 나올 수 있는 목소리가 '문예회관을 없애자'는 것입니다. 활용도가 떨어지는 시설을 굳이 유지 비용을 들여가며 둘 필요가 있냐는 거죠.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이 빚어졌다고 문예회관을 없애게 되면 결국 '문화'라는 것도 숨을 멎게 됩니다.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세종문화회관을 주축으로 각 지역 문예회관이 네트워크를 구성해 공동 방어틀을 만들자는 겁니다. 공동 방어의 일차적 틀은 일단 질 좋은 공연을 지역사회에 직접 가져가서 시민들의 공공 문화시설 활용도를 높이는 데 있습니다."
구상은 좋지만 완성도 높은 작품을 지역 문예회관에서 동일하게 구현해내는 데 드는 제반비용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박 사장은 이에 대한 해법으로 "애초에 첫 제작 단계부터 무대전환이 쉽고 이동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설치보다는 영상을 많이 활용해 작품을 기획한다"고 했다. 덕분에 지난해 처음 시작한 연계공연은 전체 공연 만족도 88%(한국문화관광연구원 조사)를 이끌어내며 의미 있는 출발을 알리기도 했다.
박 사장은 자치구 연계공연 활성화를 위해 무료·유료 공연에 대한 인식전환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단돈 천 원을 내더라도 무료 공연과 유료 공연의 관객 집중도는 확연히 다릅니다. 공연의 흐름을 쫓아오지 않고 잡음을 만들어내는 일부 관객들 때문에 무료 공연을 펼치는 공연단 자체도 공연에 대한 열의가 식어버리게 마련이죠. 또 문화는 수용자에 따라 각기 다르지 않습니까. 문화나눔이라는 명목으로 단순히 무료 공연을 많이 연다고 해서 시민들에게 이점을 안겨다 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부담이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료 관람문화를 정착하고 시민들(수용자)이 직접 취향에 맞게 문화 소비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연계공연 활성화는 물론 지역문화 발전에도 일정 부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 사장은 또 "직접 춤추고 노래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궁극에는 문화예술 발전에 밑거름이 된다"고 강조한다. 시민참여 프로그램을 확대해 단순한 문화 소비자가 아닌 참여자로 역할을 범위를 늘리고 공공 예술기관에 대한 주인의식을 고취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세종문화회관 산하 서울시오페라단은 이달 25∼28일 무대에 오르는 오페라 '아이다'에 시민합창단 45명과 시민배우 41명을 투입한다. 또 5월부터 10월까지 세종문화회관 야외 무대에서 펼쳐지는 '광화문 문화마당'과 '정오의 예술무대'에 전문 공연단체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아마추어 공연단체들의 신청도 받아 두루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場)을 열겠다는 계획이다.
박 사장은 전문 경영인 출신이었던 전임 사장 3명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전임 사장들이 비용절감과 마케팅 부분에 주력해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면 박 사장은 오랫동안 공연예술 현장을 지켜오며 민중과 호흡했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공공 예술기관으로서 세종문화회관의 입지를 다시금 세우겠다는 포부다. 그의 바람대로 "세종문화회관의 문턱을 낮춰 모든 시민이 한데 어우러지고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자리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 박인배 사장은 |
예술 생태계 건강하려면 다양성 보장돼야… 창작 활성화 힘쓸것 김민정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