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홍우 논설위원 겸 경영기획실장
한일통화스와프, 악영향 전혀 없을까
한일관계 악화, 외환위기의 방아쇠
조용하게 실익 얻는 외교정책 긴요
차기 정권에 부담 넘길 포퓰리즘 버려야
고지서의 계절이다. 매일같이 결혼청첩장이 날아들고 모임의 초청장도 쌓여간다. 모든 게 돈이다. 방에 홀로 앉아(독방ㆍ獨房) 지출을 생각하니 시름이 깊어진다. 체면과 살림살이의 갈등…. 고지서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건만 꼭 ‘독박’쓰는 기분이 든다. 해마다 찾아오는 연례행사라 해도 불황 탓인지 올해의 중압감은 여느 때보다 무겁다.
사정은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정부가 한일 통화스와프 협정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당장은 시원스럽다. 이명박 대통령의 전격 독도 방문(독방ㆍ獨訪)과 일본 국왕 관련 발언이 불거진 후 우리를 압박하려는 일본의 공세에 당당하게 대응한 점이 그렇다.
통쾌함의 이면에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정부는 통화스와프 확대 중단이 시장에 미치는 악영향이 없다고 확언하지만 과연 그럴까. 정부를 믿고 싶으나 국내외 경제상황을 생각하면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지난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로존(유로화사용 17개국)의 재정위기, 국내 경기 부진과 재정 악화, 가계부채 급증을 떠올리면 ‘보험’성격인 한일통화스와프의 사실상 축소는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과연 이게 끝일까’라는 점이다.
십수년 전에 빚어진 한일 양국 간 갈등의 역사는 대통령의 발언과 행동이 어떤 파급 경로를 거쳐 어떤 결말을 낳았는지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1995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 장쩌민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과거사 정리와 신사참배, 독도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 끝에 나온 이 발언을 일본은 바로 해독하지 못했다. ‘버르장머리’에 상응되는 일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어의 뜻이 ‘한참 웃어른이 어린아이의 못된 버릇을 고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일본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1년 뒤에 시작된 독도 접안시설 확충 공사에 일본은 거세게 항의하고 나섰다. 우리 정부는 일축해 버렸다.
갈등은 예상하지 못했던 파국으로 이어졌다. 1997년 아시아통화위기와 기아 부도사태로 금융ㆍ외환시장이 혼란을 겪고 있던 순간, 한국은 믿었던 도끼로부터 발등을 찍혔다. 약 130억달러에 달하는 일본 자금이 차환발행(revolving)을 거부한 것이다. 한국이 요구하면 자동으로 만기를 연장해주던 일본 금융회사들은 위기가 한창인 12월에만 70억달러를 집중적으로 빼갔다. 양국 간 긴장의 끝은 외환위기, 즉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였다.
수많은 실업자를 낳고 기업을 도산시키며 국민생활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외환위기와 오늘날을 비교하기가 무리일까. 15~17년의 시차를 뛰어넘은 공통점이 적어도 두 가지 있다. 첫째 예나 지금이나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둘째 일본을 향한 한국의 초강수 외교에는 정치적 계산법이 깔렸다는 논란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앞으로 날라올 고지서는 더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고지서의 발행자는 일본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이 한일 양국 간 갈등에 대해 ‘한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외신 보도는 자칫 맹방인 미국과의 신뢰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갈등은 확대재생산의 씨앗도 뿌리고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침략을 미화한 극우 교과서의 채택이 크게 늘어났다. 과거를 딛고 평화와 공존을 모색해야 할 미래세대가 왜곡된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해탄을 오가는 포퓰리즘의 악순환과 정착이 걱정된다.
차분하게 정리하고 앞으로 어떤 고지서가 더 날라올지를 걱정해야 할 때다. 불안을 최소화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고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 ‘조용한 실익 외교’는 그리 낯선 것도 아니다. 독방에서 생각해본다. 현 정권이 유발한 고지서를 누가 되든 차기 정권이 떠안게 되지는 않을지, ‘독박’을 쓰지는 않을지를. hongw@sed.co.kr